ISBN : 9788970754468
장난치듯 목숨걸고 출판했다가 ^^ 진짜 살해당한 무서운 책 두 권 소개합니다.
1. 문화의 충돌《악마의 시》
[악마의 시]는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스러운 묘사로 원리주의 이슬람 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2월 14일 이슬람 시아파 루홀라 호메이니가 그의 책을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며 루슈디의 ‘처형’을 명령하는 파트와(fatwa)를 내걸었다. 그를 이슬람을 떠나길 시도하는 배교자로 선고. 이는 루슈디가 소설에서 이슬람교를 희화화하고 무함마드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책을 출판한 이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2월 24일 호메이니는 루슈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NAVER 시사상식사전/ 악마의 시.
루슈디는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집트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죽었다. 1990년 루슈디는 수필집인 《In Good Faith》를 내어 그에게 향한 비난을 진정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며 사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의한 본인 이외에는 철회할 수 없는 파트와의 특성상, 이때는 이미 파트와를 내건 호메이니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란 성직자들은 기존의 선고를 철회하지 못했다. 1989년에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이란 정부는 공개적으로 루슈디에 대한 사형 선고를 "집행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는 이란과 영국 간의 관계 정상화라는 더 큰 명분으로 동의가 가능했다. 그 후 루슈디는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몇몇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들은 그에 대한 응징 의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 예로 1999년 이란의 한 단체는 루슈디의 머리에 28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악마의 시》는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등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영국의 몇몇 아시아인 거주지에서는 거리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가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2. 혼종에 대한 사회, 종교적 공포 - 표현주의
“너에게 나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하나이든 여럿이든, 서로 상반된 존재가 결합된 잡종이든 수순한 존재이든....” 하권 p 47
살만 루시디 자신의 평에 의하면, [악마의 시]는 혼종성과 불순함, 혼합, 변형을 찬양하며, 인간존배, 문화, 정치, 영화, 노래 등이 뒤섞여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낸다(살만 루시디. 394). 그이 작품의 주된 주제는 ‘어떻게 새로운 것이 세계에 들어오는가?’이다. 루시디는 [악마의 시]에서 그 ‘혼종성’의 주제를 형상화 하여보여준다. 인종적, 문화, 종교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뒤 섞어 뒤틀어서 결합시킨 “결합에 의한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살만 루시디. 1991) Rushdie Salman. Imaginary Homeland. 1991.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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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멧트 볼(J. Clement Bell)은 그 혼종성을 그로데스크 리얼리즘으로 해석한다. Ball, Jhon Clement. Satire & The Poscolonial....2003
잡종의 개념은 부르주아 완성된 자아의 가치에 도전한다. 그로데스크한 형상들은 고상한 것, 순수한 것, 정상적인 것을 훼손하고 조홍하다. 루시디 작품에서의 혼존성은 주로 그러한 엽기적인 형상들과 춤, 노래, 집회로 왁자지껄한 카니발적 요소들로 질펀하게 나타난다.
-1) 이민자의 문화와 살라딘 참자의 ‘변신’
이 소설에 나타난 혼종성의 주된 주제는 두 가지이다. 그 중심이 되는 하나는 저자 자신이 겪어온 문화와 인종의 뒤섞임에서 나타난 갈등과 양상들이다. 이것은 탈식민주의 소설의 주된 특징이다. 이민자 사회 즉 인도의 문화적 요소들이 새로운 사회(런던)에 이식되는 방식을 괴물의 모습을 통하여 표현한다.
루시디는 그 자신이 영국에서 인종주의를 겪었을 것이다. 탈식민 이후 영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의 근원을 루시디는 ‘체류지 상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고 해석한다. 그 공포가 이민자를 괴물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로 그린다. 루시디는 그 부정적 “괴물”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이주민가 토착민의 문화적 전쟁터인 LONDON에 던져 놓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오빠가 ‘기생충’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벌래’로 변신하여 가족을 놀라게 하는 것과 같다. 가족들은 이 벌레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결정하도록 추궁 받는다. 루시디의 ‘괴물’도 이와 같다. 이것은 이민자를 괴물로 여기는 사회에서 ‘진짜 괴물’이 되어버린 그로데스크한 이야기이다. 다만 카프카의 벌레와 달리 루시디가 그린 ‘변신’의 독특성은 다양한 종들이 뒤섞인 혼종의 상태라는 것이다. 인간과 새, 파충류가 뒤섞인 참차의 변신은 현실의 한계를 초극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민자에 대한 사회의 존재규정을 위반하고 초극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2) 기괴함과 표현주의
사실 ‘혼종에 의한 기형적 변신’이미지는 표현주의의 주된 도구이다. 기괴함 즉 ‘정상적인 것을 벗어나 원시적이고 추상적, 격정적인 것을 통해(RS. Furness)’ 관람자에게 충격이나 놀람을 주는 것이 표현주의의 주된 방식이고 현대예술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에콘 쉴레, 프란시스 베이컨, 에밀 놀데 등의 화가들의 그림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에콘 쉴레 |에밀 놀데 |프란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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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미지는 이해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표현주의의 예술원칙에 기반한 것이다. 괴물의 이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불가해한 존재’ 즉 완전한 타자성에 대면하게 하여 충격과 공포를 겪게 된다.
하이데거는 파울 클레가 1940년에 그린 아래 그림을 보고 ‘직접적인 이해가능성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루시디의 변신 이미지 또한 우리 ‘일반적인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난감함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의 변신은 이질적 문화에 던져진 이민자의 ‘불가해한’ 의식의 혼종 속에서 길러진 형상이다. 리오타르가 말한 포스트모던의 ‘표현될 수 없는 것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 (황혜조 2012 재인용)하는 방식인 것이다.
뭉크의 불안, 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난 두려움과 공포 이미지와 같이 루시디의 ‘괴물-이방인’은 인종, 문화적 코드 같은 타자의 정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의 ‘두려움-이질감’의 표현이다.
-3) 런던과 인종주의
이 소설에서 메트로폴리스 런던은 모두에게 열린 도시이지만 이방인에게는 적대감과 배제에 의해 작동하는 야만적 지대로 표현된다.
‘나는 영국시민이다’.라는 문구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런던,...그곳의 친절함-그렇다- 이민법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최근에 겪은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 말이 옳다고 믿었다. 물론 이 도시의 환대는 불완전하고 때로 편협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엄연한 진실이니,..살라딘은 ‘우리의 친절에 대해서는 우리 런던인들이 자부심을 갖을 만하지’라고 파멜라에게 말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그렇게 대립적 입장에서 논쟁을 벌인 후에는 결국 침대로 올라가곤 했는데.... 그렇게 딴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런던은-하고 그는 집요하게 생각했다. ...피난민의 후손이 아무리 반항적이고 배은망덕해도 런던은 피난처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고 , 그렇다고 저 바다건너 ‘이민자들의 나라’처럼 완전히 개방적인 것은 결코아니다.- p 하 162
참차의 강박적인 영국성 추구는 식민지 종주국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의식에서 자라나는 열긍감이 극대화된 불안의 괴물이다. 그것은 런던에 적응하고 그곳 규칙을 따르고 그곳을 사랑하려는 이방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런던의 개방성은 이성과 문명, 규칙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열려있고 그것을 위협하는 자들은 ‘나쁜 괴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루시디가 제시한 나쁜 괴물은 그동안 주류사회에서 이민자를 묘사하는 정형화된 표현 즉, ‘검둥이’, ‘단추구멍’, ‘파키’ 등의 이미지를 거부한 것이다. 오히려 전혀 인간답지 않은 하늘에서 떨어진 외계인으로 이민자를 표현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존재좌표를 잃어버린 이민자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괴물이 된 참차가 체류하는 샨다르 카페의 하숙인들처럼 사회 변두리에서 그들만의 공간에 유배되어 살아간다. 샨다르 거주민들은 사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항하며 ‘보이지 않는 도시’에 거주하는 보이지 않는 인종들이다.
실제 영국사회는 백인 브리튼의 권익보호와 결속을 위해 제국주의적 통치법안을 현실화하여 밀려오는 이민자의 유입을 막거나 추방하는 법안을 통과 시키고, 속지주의 국적법을 폐지한다. 자격 있는 자에게만 ‘시민권’을 준다.‘우리:타자’의 갭이 생기고 그 틈은 더욱 벌어져 차별과 편견이, 인종주의가 정당화되고 서로는 서로에게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루시디가 주류사회 구성원들이 무의식적 적대감으로 이방인을 괴물화해서 배척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회시켜 눈 앞에 들이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루시디는 인종적 타자 본인들만이 이 짐을 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인종주의’는 사회인식의 문제이며 ‘인종적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주류사회 구성원들인 ‘백인’들이 고민해야 할 사안이라고 문제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괴물의 이미지는 영국화와 진정한 영국인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이중의식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지배문화의 타자성을 조롱하는 이주민의 이중의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4) 이슬람문화와 지브릴의 환상
또 하나의 주제는 영국의 정체성 안에서 무슬림의 정체성이 섞여 나타날 때 나타나는 혼종에 대한 사회적 공포, 알 수 없는 이질적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거칠고 자유롭게 형상화 하여 세상에 내 보인다. 거칠고 자유로움은 종교적 편협성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곧 사회적 공포로 현실화 되어 폭력적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악마의 시]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장사꾼으로, 예언자의 열두 아내를 창녀로 풍자하면서 비난을 받는다. 서구권과 이슬람권의 전혀 다른 믿음과 문화의 전쟁을 유발한다. 이는 영국의 이주민 정책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이민자들이 영국사회에 문화적 뿌리를 내리려는 시점에서 시작되는 근원적 갈등과 윤리적 불균형이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 것이다.
지브릴의 꿈-환상속에서 예언자 마훈드가 자할리아 정복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암투와 술수를 보여 줌으로써 종교의 허구적 가능성과 복수적 역사의 또다른 가능성 제시한다. 이는 살라딘 참차의 변신-괴물과 같은 효과를 내는 도구이다.
대천사 지브릴과의 씨름이 끝난 후 예언자 마훈드는 기진 백진하여 깊은 잠에 빠진다. ... 텅빈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한다. “ 그건 악마였어. 지난번의 그것, 악마였어”
.... 허둥지둥 도시롤 돌아가는데, 지독한 유황냄새가 나는 그 못된 시를 제거하기 위해, 영원한 기록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 어쩌다가 한두 권의 옛이야기 책에나 간신히 찾아볼 수 있고 그나마도 정통파 해석자들이 말짱 백지화 하도록, 그러나 카메라 앵글을 최대한 높게 잡고 두둥실 떠올라 지켜보고 있는 지브릴은 한 가지 사소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 둘 다 나였어, 바바, 처음에도 나였고, 두 번째도 역시 나였다고”
.... 세 여신의 신상 앞에선 마훈드는 샤이탄이 귓가에 속삭여준 시구들을 취소한다고 발표한다. 이 구절들은 진정한 암송문, 즉 알쿠란에서 제외되고 새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너희는 아들을 낳건만 신은 딸을 낳아야 하겠느냐? 참으로 공평한 분배로다”
.... ‘악마의 시’를 부인한 후 예헌자 마훈드는 .... p186
.....
책들을 불사르고 성스러운 책을 신봉하라. 종잇장들을 찢어버리고, 일찍이 천사 지부릴이 사자 마훈드에게 전하고 해석자와 이망이 설명해 놓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아멘(Ameen)” p 308.
루시디가 [악마의 시]를 통해 이슬람 문화에 이런 과격한 도전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루시디는 ‘문학’을 유일한 ‘담론의 각축장’, ‘언어들의 투쟁이 실행되는 장소’의 특권을 가진 다고 믿었다. 그래서 ‘작가’는 공포와 불안이 가득한 혈실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고요한 고래뱃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 군중과, 대양, 폭풍속의 현실적 존재이며 역사적 존재이다. (Rushdie Salman. Imaginary Homeland. 1991. p427) 이는 문학의 정치적 특성과 작가의 사회적 책무를 지적한 말이다. 그는 희생을 강요당하는 현실에 침묵할 수 없다고 ‘점피조시’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데올리기적 면에서 저는 희생자가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모든 권력남용에는 피해자의 책임도 없지 않습니다. ... 우리 모두의 수동적 태도가 그런 범죄를 허용하는 거죠
표현주의의 표현성은 신념과 의지, 혁명성 등을 대비시켜 새로운 감정을 산출하는 양식에 대한 관심이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개혁의 의지를 , 정신의 강렬함을 제시하려는 행동력이 있다. (박찬기.표현주의 문학론.p 49. 재인용)
루시디는 참차의 괴물-이미지를 통해 욕망의 변태성을 지적한다.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은 완결된 정체성이다., 영국성이든 인도성이든 정체성은 선택이나 전유의 문제이다. 진정한 의미의 정체성은 변화와 변신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양한 자아의 모습 즉, 잡종의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극단의 완결된-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정체성이 종교의 배타성이다. 이 작품은 종교와 인종, 언어, 정치 등 모든 굳어진 정체성과 관점의 한계에 도전하는 도발적 작품이다. 그는 변화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p 86
낡은 것들은 죽지 않으면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지 못한다. p 561
-3. 마술적 리얼리즘『악마의 시』
금기(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를 다루면서도 그 표현법은 다양한 주석, 다양한 함의, 언어적 유희를 포함한 방대하고 초현실적이므로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와 유머 통찰과 비판, 새로움을 동시에 겸비한 작품이다.
혼종과 잡탕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그 줄거리가 논리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쩌면 [악마의 시]는 번역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운 책이다. 독서량이 부족한, 더구나 영국,인도의 소설이나 문화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그것도 번역본을 읽으면서 이 책의 진가를 이해 할 수 있을까? 소설 곳곳에서 나 홀로 문외한이 된 느낌을 받았다.
저 밑에 영국의 옷소매(영불해협을 뜻하는 흐랑스어 라 망슈를 직역한 말)가 그들의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오 내신발은 일제라네(라지 카프르 감독의 영화 <슈리 420>삽입곡) 상권18
정치적 시외 깃발마다 ‘염소맨’을 상징하는 ..주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6인을 구하자 4인을 석방하라. 하인즈57을 맛보세요(하인즈 식품회사를 빗대어 숫자를 잘 쓰는 영국식 구호를 조롱하는 말). 라디오에서는....반가워요오옹. 내 이르믈 마쳐 바요오오(‘악마에 대한 공감’의 가사).-하권 417
소설은 두 명의 등장인물이 현실과 꿈, 환상 그리고 과거와 비 현실적인 현재를 넘나들며 종교와 현실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과거천사의 모습을 지닌 지브릴이 꿈 속에서는 대천사(가브리엘)로 추앙받지만, 현실에서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는 볼리우드 영화배우이다. 지브릴은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종교의 편협성과 그 허술한 믿음의 토대를 환상과, 꿈, 정신착란등의 방법으로 어수선하게 파헤쳐 독자 앞에 드러내는 중심 축이다.
인도의 사업가의 아들, 영국에서는 언제나 외국인 취급을 받는 살라딘 참차가 또하나의 기둥이다. 참차는 인도인이지만 영국에서 진정한 영국인이 되고자 하는 이방인의 분열된 자아상을 보여준다. 또한 런던 사회가 이질적 대상에게 드러내는 폭력성과 배타성을 ‘괴물로 변신된 몸의 묘사된 형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나아가 무엇보다. ‘루시디’는 이 작품 [악마의 시]를 통해 이슬람문화의 사회가 감추고 있는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도덕성의 기초를 흔들어 폭력적인 현실의 ‘사회현상’으로 발현하여 보여주는 당사자가 된다.
* 4. [악마의 시] 내용 전반부만 살짝 발췌 ^^
참차가 지브릴과 함께 테러로 폭발한 비행기에서 (장난스럽게?) 추락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 두 명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폭발한 비행기로부터 영국해협으로....
그들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파괴된 보스탄 호에서 떨어져 뮤사히 살아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해변으로 밀려가서 발견되었다. 둘 중에서 말이 더 많은 쪽, 그러니까 자줏빛 셔츠를 입은 자는 정신없이 횡설수설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물 위를 걸었으며 파도가 자기들을 태워 가만히 해변까지 데려다주었다고 증언했다. ....
“우리는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이렇게 운이 좋을 수도 있습니까?”
물론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소부재니 무소부지니 하는 것들을 주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일은 참차가 의지력으로 원했고 그 의지에 따라 파리슈타가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어느 쪽인가? 파리슈타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나, 천사의 노래, 악마의 노래? 나는 누구냐고?
이렇게 표현해 보자: 누구의 노래가 최고인가[좋은 노래들은 악마가 독차지하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찬송가를 편찬햇던 18세기 존 웨슬리를 빗댄말*]?
.... 다시 태어난 거야 스푸노 자네와 나. 생일 축하해....1권 p.25
대천사 지브릴
종교와 신앙에 관련된 내용들은 주로 병을 앓고 난 후 신앙을 잃어버린 정신병자, 배우 지브릴(대천사 가브리엘이라는 환상에 빠진다.)을 통해 그려진다.
「병을 앓는 동안에 그는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신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 덕분에 고통을 견딜 수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화가 났다. ~신에 대한 분노 덕분에 그는 다시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자기가 '텅 빈 허공'에 대고 말하고 있음을, 그곳에는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고, ...그는 그 공허를 향해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못 느껴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금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식당에 우뚝 선 채로 돼지들을 뚝뚝 떨어뜨리며 먹고 있었다.」<상p53>
‘악마의 시’란 단어는 예언자 마훈드의 계시 받음과 코란의 허구성을 비꼬는 내용에서 등장한다. 가브리엘(지브릴)은 그저 자신은 꿈 속에서 지껄였을 뿐인데, 이를 천사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예언자 마훈드와 아에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인 규율에 묶여 그 속에서 강제당하고 복속당해야 하는지를 현학적으로 넉살스럽게 풀어 놓는다.
마훈드가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를 받아 대 종교를 만드는 장면이다. 어느 정도 코란이나 코란에서 삭제된 부분을 첨가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체적으로 지브릴의 환상속인지, 그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인지 모호한 혼재된 상황에서 전개된다.
내용 자체는 좀 혼란스럽지만, 어수선한 가운데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꼽니다. 의도는 가상한데 아무튼 이 작가와 이 책에 관련된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해 위협에 시달리거나 실제 살해 되었죠.
역시 종교는 무어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