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zenzen25
<레이스의 결과_ 5318855> 리포트 01
라밧으로
로마에서 몰타의 수도 발레타Valleta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로마를 빠져나오는 과정은 피난에 가까웠다. 보름 가까이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린 로마 시내에서 엉망진창의 대중교통과 씨름을 했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지중해 바다에서 돌고래처럼 헤엄을 치는 상상을 하니 행복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몰타 땅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고, 그만큼 귀여운 공항은 의외로 어딘가 미래적인 느낌을 풍겼다. 늦은 시각에 공항에 도착해 근처에 급하게 잡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예약한 숙소의 주소가 구글맵에 잡히지 않았다. 구글맵이 알려준 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뿐이었다. 길에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처음 들어보는 도로명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몰타가 아닌 이탈리아 번호였다. 가짜로 등록된 유령 회사인가? 사기꾼에게 속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이 땅은 포탈이다.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여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토끼굴로 들어가야 한다. 침착하게 호텔 매니저가 보내온 메일을 다시 열어 보았다. 호텔 이름 옆에 ‘Rabat’이라는 글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구글맵을 열어 주소가 아닌 호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발레타가 아닌 ‘라밧Rabat’에 호텔 위치가 뿅 나타났다.
라밧이라니. 발레타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적어도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일단 택시를 불렀다. 미스터리가 해결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행자들이 대체로 발레타에 모여드니까 주소를 발레타로 써놓고 일단 낚아 보려는 고약한 수작인가? 이메일에는 ‘라밧’이라고 써두었으니 그걸로 할 도리는 했다는 건가? 아냐, 이건 명백하게 호텔 측의 잘못이야. 끝까지 따져서 택시비랑 땡볕 아래 고생한 비용까지 다 보상받아야지.
그런데 말이다. 계획에도 없던 일이 이렇게 생겨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허연 수염이 성성한 백발의 할아버지가 파란 대문을 열고 나와 함박웃음으로 나를 반길 때부터 그 ‘이유’를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미소에 덩달아 웃으면서도 입안에서는 택시에서 정리했던 말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할아버지의 미소도, 파란 대문도 정말 아름답지만,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예약 사이트에 주소가 잘못 기재되어 있어요. 발레타에서 한참이나 헤맸어요. 다른 여행자들도 혼란스러워할 거예요.”
“허허허. 미안해요. 이 숙소를 오픈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답니다. 당신이 세 번째 손님이에요. 전화번호와 주소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익스피디아 측에서 아직도 처리하지 않고 있어요. 정말 답답한 노릇이죠. 허허허.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볼 게요. 참! 아침 식사는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가서 하면 돼요. 멋진 곳이랍니다. 위치를 알려줄게요. 동네 구경을 시켜줄 테니 따라와요.”
구글맵이 다 뭐람. 굳이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손목을 잡아끄는 백발의 할아버지를 말릴 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사도 바울의 흔적이 남은 그로토Grotto 동굴와 카타콤Catacombs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 무덤에 꼭 들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몰타는 ‘멜리데’라는 이름으로 성경에도 등장하는데 특히 라밧은 사도 바울을 로마로 압송하던 배가 난파하여 표류한 지역으로 몰타의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버스 정류장부터 분위기 좋은 펍, 맛있는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카페까지 느릿한 할아버지 걸음을 좇아 걷는 사이 동네 구경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버스 정류장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임디나에 가면 끝내주는 선셋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가 있어요. 커피도 훌륭하답니다.”
임디나Mdina는 몰타 기사단의 근거지였던 몰타의 옛 수도다. 그러니 몰타 기사단의 흔적을 좇고 있다면 발레타가 아닌 임디나에서 그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맞다.
(중략)
수도가 발레타로 옮겨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침묵의 도시Silent City’가 되었지만, 기사단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임디나는 여전히 흥미로운 곳이다. 몰타의 건물들은 대부분 라임스톤석회암으로 지어져 있다. 단조로울 법도 하지만 몰타 사람들이 대문과 창문을 형형색색으로 꾸며 활기를 더한 덕분에 몰타의 섬 전체가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와 같이 알록달록하다.
임디나는 낮보다 밤이다. 밤이 되면 라임스톤이 신비로운 빛을 사방으로 내뿜고, 임디나는 커다란 달처럼 빛난다. 고요한 임디나의 골목 구석구석을 걷고 있으면 몰타 기사단과 그랜드 마스터의 이야기들이 유령처럼 거리를 서성인다. 기사니, 뭐니 하는 중세의 이야기들은 뻔한 구석이 있지만 임디나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다. 은색 갑옷을 걸치고 키보다 더 큰 창과 방패를 양손에 든 바로 그 기사의 이야기가 이 도시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다시 라밧으로
발레타로 집을 옮기고 다음 날, 라밧에서 날아온 메일을 받았다.
지혜 씨. 여권과 지갑을 방에 두고 갔더군요.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받지 않길래 메일을 보내요. 이 메일을 확인하는 대로 전화줘요. 물건들은 여기 무사히 보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럴 수가. 뉴욕에 이어 두 번째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심각한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아마 몰타를 떠나는 날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마지막 날 짐을 싸면서 ‘아, 여권!’하고 사색이 되어 파르르 떨었겠지. 존 할아버지가 체크인할 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면 진작 알았을 텐데! 물론 그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날 라밧으로 가서 여권과 지갑을 받아 왔다. 귀찮은 걸음이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역시 복작거리는 발레타보다는 한적한 라밧이 나와 훨씬 잘 맞는다. 골목을 걷다 우연히 벽에 붙은 흥미로운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500년 된 고택을 판다는 내용이었다. 라밧에서 태어난 유명한 조각가 안톤 아지우스Anton Agius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임디나 대성당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동상 앞을 몇 번이나 지나치기도 했고. 안톤 아지우스 동상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포스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길을 가다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전화했어요. 자세한 정보를 좀 얻고 싶어요.”
“오, 반가워요. 전화 주어서 고마워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그쪽으로 자세한 정보를 보내 드릴게요. 그런데 어떤 목적으로 집을 사고자 하시는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저는 한국인 여행자예요.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싶어요.”
“멋진 생각이군요. 정말 굉장해요! 지금 당장 메일을 보낼게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줘요.”
우리의 대화는 짧고 강렬하게 끝이 났다. 그는 바로 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 집을 만나기 위해 다시 라밧으로 보내진 것이 틀림없었다. 여권을 괜히 놔두고 간 것이 아니었군. 역시 일이 이렇게 될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매거진 춘자, 몰타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