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T History: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블록체인에서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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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을 공부하다보면 유독 ‘생태계’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블록체인은 단순한 도구로써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생태계에서 다양한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그 세계가 건전하게 발전하는 것처럼, 블록체인도 학제간의 협동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문계의 상상력과 논리(logic)에 의거한 설계 없이 기술만 덩그러니 놓아져 있다면 블록체인이라는 배는 방향을 잃은 표류선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생각만 거창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실질적인 기술이 없다면 블록체인호는 설계도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에 불과하게 되겠죠. 결국 블록체인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발전시키려면 양자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꾸준하게 나타나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둘 중 어떤 것을 먼저 확립하는 게 효율적이냐 묻는다면 아무래도 생태계의 키잡이 역할을 하는 ‘인문학적 사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블록체인 생태계를 가장 처음 창조한 비트코인이 탈중앙화 화폐를 기치로 등장했으니, 블록체인은 인문학의 분야 중에서도 경제학적 사상이 많이 녹아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EOS, 비트쉐어, 스팀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개발자 댄 라리머도 본인을 스스로 경제사상의 한 갈래인 오스트리아 학파라고 공언한 상황입니다. 또 작년 JTBC 암호화폐 토론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논쟁 중 하나였던 ‘선의의 노드’문제도 사실은 경제학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문제죠. 따라서 경제사상의 원류를 되짚어 블록체인을 다시 바라본다면 앞으로 블록체인이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서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학사에서 최초의 사상이라고 부를만한 이론은 언제 등장했을까요? 나카모토 사토시가 비트코인 백서를 통해 블록체인의 사상적 근간을 처음 언급했다면, 경제사상사에서는 흔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경제사상의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살펴보고, 경제사상이 왜 블록체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업의 발견

오늘날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한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부품별로 분업을 해서 한 대의 자동차를 완성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이 자동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생산성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18세기 영국에서조차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깨닫기는커녕 18세기 중반의 서유럽은 산업혁명의 태동으로 인해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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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 철학 교수를 하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유럽여행을 다녀온 스코틀랜드의 한 남자가 세상을 뒤흔드는 책을 1766년에 발표하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습니다. 여기서 애덤 스미스는 그의 책 맨 첫 장에 핀 공장을 예로 들며 분업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노동생산력을 최대로 개선 및 증진시키는 것은, 그리고 노동을 할 때 발휘되는 대부분의 기능 숙련 판단은 분업(division of labour)의 결과인 것 같다. …… 아주 소규모 제조업이지만, 그것의 분업이 자주 언급된 적이 있는 핀 제조업을 예로 들어 보자. 핀을 만드는 중요한 작업은 약 18개의 독립된 조작으로 분할되고 있는데, 어떤 공장에서는 이 18개의 조작을 18명의 직공들이 나누어서 하고 있고, 다른 공장에서는 한 직공이 두세 가지 조작을 담당하고 있다. …… 그러나 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완성품을 만든다면,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이 특수 업종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면, 그들 각자는 분명히 하루에 20개도 만들 수 없을 것이며, 어쩌면 하루에 1개도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부론 상권 분업 7~9P)

이와 같은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당시로써 사고의 전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미 핀 공장처럼 소규모 제조업에서 무의식적으로 분업의 원리를 깨우치던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내서 체계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을 꽃피워 내면서 애덤 스미스의 분업원리를 바탕으로 생산성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동가치설

애덤스미스는 또한 상품의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매겨진다는 노동가치설의 창시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론에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도 한 몫 했습니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금은의 축적이 국부를 창출해낸다는 사고를 가진 중상주의자들이 경제의 주류사상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직 금은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라 주장하면서, 금은을 모으는 방법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타국의 철이 자국의 철보다 질이 좋을지라도 그것을 수입해오면 금은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일부러 질이 떨어지는 본국의 철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자국보다 질이 좋은 상품을 들여오면서도 금은을 유출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서구열강들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죠. 식민지로 만든 국가는 이런 비정상적인 거래에 항의할 힘이 없었으므로 중상주의자들의 입맛에 딱 맞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상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 자국을 병들게 만들어갔습니다.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물품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식료품 및 원자재였으며, 결국 고급기술이 필요한 제품들은 식민지가 아닌 곳에서 구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중상주의자들의 사상과 위배되는 결과가 일어납니다. 결국 중상주의자들은 수입은 최소한으로만 하고 수출로 금은의 축적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출의 과정에서 그들은 더 큰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상인을 착취하고 독점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은 이런 중상주의자들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었습니다.

소비야말로 모든 생산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며, 생산자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한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명제는 더없이 자명한 것으로서, 이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중상주의에서는 소비자의 이익이 거의 언제나 생산자의 이익에 희생되고 있으며, 중상주의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을 모든 상공업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목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국부론 하권 8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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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축적보다 노동의 가치에 의한 소비의 증진이 훨씬 낫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환의 매개체인 화폐는 말 그대로 교환가치라는 관념이 부여된 것이라 주장하며, 그 값을 매기는 척도는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10의 강도로 만들어진 상품에는 만원의 가치가 부여되고, 1의 강도로 만들어진 상품에는 천원의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노동가치설은 노동 강도의 기준, 상품의 상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나와 있지 않았으며, 뒤이어 나타나는 새로운 생산방식인 기계제 대공업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고안해낸 노동가치설의 부족한 점은 훗날 데이비드 리카도와 칼 마르크스가 보완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손

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보이지 않는 손은 한 번쯤 들어봤던 용어일 것입니다. 그만큼 애덤 스미스의 업적 중 가장 파급력이 컸던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가치설의 배경처럼 중상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이 이론은, 경제뿐만 아니라 당대의 도덕과 철학에도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중세에서부터 금기시되며 내려오던 이기심에 의한 사익 추구를 오히려 합리적이며 더 큰 국부를 불러다주는 원천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국부론 상권 P19)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의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국부론 상권 P552)

애덤 스미스의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시대는 종교개혁 이후 다시 한 번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블록체인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애덤 스미스

블록체인의 핵심철학은 탈중앙화입니다. 그만큼 어떤 하나의 조직에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율성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철학은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이야기했던 초창기 원시적인 분업의 원리가 블록체인 생태계 안에서 더욱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핀 공장에서의 분업은 단순히 생산적인 면에서 하나의 물품을 단계별로 만들어내는데 불과했지만, 블록체인의 세상에서는 중계자조차 없이 생산, 소비, 서비스, 마케팅, 아이디어 등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블록체인은 앞으로 중앙에 의한 단일지성체제를 넘어 분업화된 집단지성체제로의 발걸음을 이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손이 블록체인에서 다시 대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암호화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JTBC 암호화폐 토론회에서 나왔던 ‘선의의 노드’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식에는 컴퓨팅 파워에 의한 채굴, 지분에 의한 보상, 채굴 권리를 위임하여 얻는 보상 등 다양한 길이 있으나, 결국에는 보상을 추구하는 개인의 이기심이 공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원리가 공통적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나카모토 사토시의 비트코인 백서에도 이런 철학이 그대로 명시되어있습니다.

The incentive may help encourage nodes to stay honest. If a greedy attacker is able to assemble more CPU power than all the honest nodes, he would have to choose between using it to defraud people by stealing back his payments, or using it to generate new coins. He ought to find it more profitable to play by the rules, such rules that favour him with more new coins than everyone else combined, than to undermine the system and the validity of his own wealth.(비트코인 백서 incentive 부분 中)

개인들의 이기심에 의해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태계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 득이 되기 때문에, 참여자들이 악의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선의의 노드’는 보상을 얻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공익증진으로 이어진다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착한 참여자들이 선의의 노드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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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공명정대한 관찰자’역할을 블록체인이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명정대한 관찰자는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개인을 가만히 두면 사회가 아비규환이 될 것 같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종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막상 자유를 줘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보다 먼저 나온 것을 생각하면 공명정대한 관찰자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을 뒷받침해주는 철학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관찰자 개념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개인을 자연 그대로 두었을 때, 양심이 지켜지는 경우보다는 안 지켜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국가나 거대 세력에게 지나친 권한을 넘겨버리면, 중상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났던 현상처럼 해당 조직이 단체로 부패하여 개인을 옥죄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은 원론적 결론을 내립니다.

동업자들은 오락이나 기분전환을 위해 만나는 경우에도, 그들의 대화는 공중에 반대되는 음모나 가격인상을 위한 모종의 책략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거의 없다. 이러한 모임을 실제로 집행 가능하거나 자유와 정의에 모순되지 않는 법률로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률이 동업자들의 이따금의 모임을 저지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법률이 그러한 모임을 촉진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그러한 모임이 필요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국부론 상권 P168)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법률이 공중의 담합을 촉진할 수 없도록 나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그 법률의 강도가 어느 수준에서 집행되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예외의 사항을 계속 임의로 적용하다보면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겠죠.

이런 딜레마 속에서 블록체인은 애덤 스미스가 원했던 세상에 대한 비전을 다시 제시합니다. 모든 장부가 투명하게 기록되는 블록체인 기술이 정착된다면 우리 모두가 공명정대한 관찰자를 기술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만에 하나 그것을 지키지 않는 개인이 등장하더라도 데이터에 기록된 조작할 수 없는 증거 아래 공정한 법의 심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앞으로 이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철학과 기술을 가진 집합체가 애덤 스미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요? 이미 그 위대한 실험은 진행 중입니다.

SH

참고문헌
비트코인 백서
Why I am an Austrian Economist
토드 부크홀츠 저, 이승환 역,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김영사
애덤 스미스 저, 김수행 역, 국부론(상), 비봉출판사
애덤 스미스 저, 김수행 역, 국부론(하), 비봉출판사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국부론 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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