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의 경제공황에 대한 해결책의 일환으로 구상된 레귤레이션 Q는 아마도 미국의 경제정책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제도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일시에 은행예금을 찾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33년 The Bank Act 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레귤레이션 Q이다. 주요 내용은 미국 은행예금에 대한 이자 지급율을 제한 하는 법이었다. 주로 자유저축예금과 같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예금에는 이자를 주지 않도록 했고 정기예금에만 이자를 주도록 했는데 그 나마도 연준에서 이자율을 통제하도록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레귤레이션 Q는 많은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특히 앞에서도 말한 것 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후 무역에서 이익을 남긴 미국 기업들이 달러를 미본토에 보내는 것이 아닐라 런던에 있는 은행에 보관하고 냉전으로 자산 동결을 우려한 소련이 달러를 런던에 있는 은행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유로달러가 생기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었다.
레귤레이션 Q가 작동하면서 미국의 달러화는 여러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금태환제의 위기였다. 미국내의 달러가 자꾸 빠져나가고 유럽대륙에 대한 투자는 계속되는 상황에서 1온스를 35달러로 규정한 1944년의 브레튼 우즈 체제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은 금 1온스당 35달러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부터 미국정부는 엄청난 양의 달러를 찍어내기에 이른다.
이와함께 유로달러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당연히 미국의 달러는 이자율이 비싼 유럽으로 향했다. 유로달러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우선 미국달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시급해졌다. 그 이전에 레귤레이션 Q를 폐지해버렸다면 어땧을지 모르겠다.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달러의 유출을 막기위해 이자평형세(IET)라는 세금을 만들어 미국 자본이 타국의 증권을 구매할때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고 해외 신용억제 프로그램(Foreign Credit Program)을 설립하여 해외직접 투자를 진행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대한 대출 상한선을 만들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관련한 음모론 중에서 군산복합체가 월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시나리오가 있다. 그러나 케네디가 미국 자본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금융자본 쪽에서 암살했다고 하는 점이 더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게다가 월남전 참전 결정과 별 상관도 없는 법무장관 동생 케네디도 암살 당했다는 것을 보면 전혀 무관한 듯한 것도 아닌 듯 하다.
케네디 대통령 당시에는 미국의 자본을 직접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금태환제도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그이후에는 방향이 바뀐다. 즉 국내 이자 상한선을 올려서 해외에 있는 달러가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연준은 1964년과 65년 이자상한선을 두차례 올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1966년 이자상한선을 올리지 않자 미국의 달러는 해외로 급속하게 빠져 나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은행들은 해외에서 달러 거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해외에 지사들을 경쟁적으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영국의 파운드화 평가 절하가 발생하면서 해외에서 달러의 소요가 급증한다. 1967년 1파운드당 2.8$이던 것이 2.4$로 절하되었다. 영국의 무역수지가 악화되었고 실업률 증가 때문에 금리를 낮춘것이 수입증가로 이어지면서 파운드화가 해외로 많이 풀려나가 화폐가치 유지가 힘들어 졌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럽에서의 달러화 수요는 늘어났다.
1968년도부터 런던을 중심으로 하는 유로달러 시장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로달러 시장의 확대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결국 붕괴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의 해외이탈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69년 9월에 연준은 미국 은행들이 해외지사로 이전하는 금액의 10%를 지급준비율로 확비토록했다. 그리고 70년 6월에는 단기예금증서(양도성 정기예금증서, Certificate of Deposit)에 대한 이자율 상한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73년 5월에는 장기예금정서에 대한 이자율 상한도 폐지함으로써 미국 은행들이 유로달러에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를 상당부분 제거해 나갔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은 이미 브레튼 우즈체제에 따른 금본위제도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이후 국제통화제도는 변동환율제도로 전환되어 지금에 이르기 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미국은 거의 무한대의 적자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상황을 누리게 된다.
미국의 은행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게하는 유인요소가 줄어들었지만 유로달러 시장규모도 계속확대되었다. 다국적 기업을 필두로 유로달러에 대한 소요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뒤이어발생한 오일쇼크로 인해 국제시장에서 현금 거래의 수요가 커졌다. 아랍권 국가들은 미국이 자신들이 미 달러계좌를 동결할 수도 있다고 보면서 현금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레귤레이션 Q가 종말을 고한 것은 1980년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카터 대통령은 미국 중앙은행과 예금자의 요구를 반영한 예금기관 규제철회법을 제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레귤레이션 Q의 내용 상당부분이 없어졌다. 특히 레귤레이션 Q의 근간을 이루던 장단기 예금증서에 대한 이자율상한선에 관한 내용은 1980년 예금기관 규제철회법 서명당시 6년간의 유예기간을 두는 것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페지되었다.
한편 그 중 요구불 예금에 대한 이자율에 관한 내용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나 2010년 도드-프랭크 법안이 만들어지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도드-프랭크 법안은 오마바 행정부때 만들어진 법으로 금융위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안이다. 이법안은 1933년의 The Bank Act 이후 가장 강력한 규제법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법안은 시장감독 기관의신설 및 강화,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강화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간의 합병을 금지하는 볼커룰은 오바마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추가된 것이다.
개략적으로 레귤레이션 Q의 변화과정과 유로달러 시장의 상관관계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아주 쉽게 정리한다고 했는데 스티밋 동지들께서 제대로 이해하셨는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레귤레이션 Q가 유로달러의 조성에 한몫을 했고 그 이후에 미국은 레귤레이션 Q에 따른 규제를 계속 없애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유로달러의 형성과정에 미국의 금본위제도도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금본위제도가 폐지되면서 누적된 문제가 폭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이 2008년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08년의 자본주의와 그 이후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2008년의 문제를 뒷정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껏 조치해온 것들이 새로운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양적완화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암호화화폐라는 것이 미국의 양적완화에 대한 사적수준의 대응이라는 점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유로달러는 2008년이후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다음에는 2008년이후의 유로달러와 미국달러가 어떤 과정을 겪게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