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남은 스스로 없다가 문득 생기는 것이고, 사람이 죽음은 스스로 있다가 홀연히 없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혹은 있다고 하고 혹은 없다고 하며, 오래되면 장차 사라져 없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 정식(情識)의 망령된 법이며 무생(無生)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홀연히 꿈을 꾸고 꿈을 깬다. 그래서 능히 꿈을 꾸고 꿈을 깨는 것이 마땅히 있음을 안다. 꿈이 있기도 하고 꿈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혹은 꿈을 꾸고 혹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응당 있음을 안다. 삶과 죽음은 큰 꿈이다. 잠들고 깨는 것은 작은 꿈이다. 대체로 작은 꿈은 큰 꿈에 의지하여 생기고 사라진다. 큰 꿈은 꿈 아닌 것에 의지하여 숨고 나타난다. 불교를 사랑한 조선 유학자의 선어록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특히 용수보살이 쓴 중론을 처음에 읽으면 '이게 뭔소리여? 이 사람은 말장난을 너무나 잘하는 군' 이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또한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었음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언어로 표현되면 먼저 '인것'과 '아닌 것'으로 분별이 되어버리는데 분별은 전체로서 분별이 성립된다. A인 것과 A가 아닌 것은 처음부터 A만 홀로 있었다면 A라고 불려질 수도 없다. 인식이라는 것이 모두 그렇다. 전체 속에서 그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아닌 것으로 나누는 그 행동이 바로 인식이다. 그러니 그 전체 스스로가 전체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인식이며 태어나서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과정일 따름이다.
이것은 다 정식(情識)의 망령된 법이며 무생(無生)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是皆情識妄度 不知無生之理也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다. 존재하지 않음을 떠나서 존재함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구분은 처음부터 망령되게 헤아려서 생겨난 것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않았음(無生)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어버린다. 다만 태어나고 죽음은 상호의존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 즉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전체로 돌아갔다는 뜻이리라.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인연법을 말씀하셔서
언어의 허구에 의한
온갖 희론을 바로잡으셨습니다.
모든 설법 가운데 으뜸인
인연법을 말씀하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중론 - 말과 생각을 넘어서 말하고 생각하기
술몽쇄언(述夢瑣言)
프롤로그 | 눈뜨고 꾸는 꿈(開眼) | 스스로 불러옴(自求) | 징조와 경험(徵驗) | 마음에 물음(問心) | 뒤바뀜(轉倒) | 진실한 것을 인정함(認眞) | 도장 자국(印影) | 스스로 의심함(自疑) | 범위에 한정됨(圈局) | 무념(無念) | 어둠과 받아들임[昧受] | 항상함을 앎[知常] | 업과 명[業命] | 호랑나비[胡蝶] | 스스로 이룸[自成] | 진실한 것을 인정함 [認眞] | 돌아감을 앎[知歸] | 허망한 환영[妄幻] | 지음과 받음[能所] | 고요하게 비춤[寂照] | 홀로 밝음[孤明] | 원인과 조건[因緣] | 겨울 꿩[冬雉] | 초연(超然) | 스스로를 말함[自敍] | 나를 찾음[求我] | 아직 남아있음[猶存]
몽념수필(夢念隨筆)
자각몽 연습을 시작하며 | 쓰끼다시 | 수면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