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 나타난 사물을 없애버린다고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사물을 멀리 한다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마음을 비울 수 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이 어찌 눈을 감고 있으라는 뜻이겠으며, 욕심이 날만한 것을 보지 말라는 것이 어찌 사물을 멀리하라는 뜻이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내 마음에는 기생이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마음속에 기생이 없다면 기생과 음악이 항상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한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술몽쇄언/매수(昧受)
이렇게 말하기는 참 쉽다.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곧 깨달았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정의하는 해탈은 오욕(탐냄, 화냄, 어리석음, 우쭐거림, 의심)의 완전 소멸이다. 우선 그것을 피하지 말라고 한다. 오욕을 멀리하지 말고 맞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탄트라 요가는 섹스조차 수행의 도구로 이용하라고 한다. 무엇이든 맞서되 다만 거기에 물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욕을 맞서려는 의지가 먼저일 것이다. 그 의지를 용기라고 불러도 되겠다. 탐욕에 맞대응, 성냄에 맞대응, 어리석음에 맞대응, 자만심에 맞대응, 의심에 맞대응. 그래서 요가 수행자들을 오욕과 싸우는 전사 혹은 투사라고 부른다. 금강승의 비유도 차돌보다 단단하여 절대 깨지지 않는 그런 금강석과 같은 굳건함이 있다는 뜻에서다. 수행자와 다르게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맞서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용기가 너무 고상해 보여서 하기 싫거나 오욕이 아주 달콤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현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어리석음이 있고 없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일반인도 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인도 현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
어둠과 받아들임이니 정신적 어둠이나 물질적 어둠이나 모두 받아들이라고 한다. 정신적 어둠이 혼탁한 마음(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의심)이라면 물질적 어둠은 빛이 없는 캄캄함이 될 터이니 세상을 피해 동굴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나 일반인이나 기본적으로 어둠 속에 사는 인간들이다. 그러므로번뇌 속에서 혼탁하게 살거나 스스로 세상을 피해 고립되어 살거나 모두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우리는 이미 마음을 비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나 다름없다는 결론, 그래서 수행한다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결론.
육체적 죽음은 그 육체와 함께하는 정신의 소멸일 테니까 그 육체 입장에서 마음은 자동적으로 비워지게 된다. 그러니까 마음을 비운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미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라도,
마음에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마음을 비울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우선적으로다가 오욕을 피하는 연습이 필요할지도, 그래서 산속으로 도닦으러 드간다. 그러나 대부분 내려오면 말짱 도루묵이요.
술몽쇄언(述夢瑣言)
프롤로그 | 눈뜨고 꾸는 꿈(開眼) | 스스로 불러옴(自求) | 징조와 경험(徵驗) | 마음에 물음(問心) | 뒤바뀜(轉倒) | 진실한 것을 인정함(認眞) | 도장 자국(印影) | 스스로 의심함(自疑) | 범위에 한정됨(圈局) | 무념(無念)
몽념수필(夢念隨筆)
자각몽 연습을 시작하며 | 쓰끼다시 | 수면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