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재해석] 피리 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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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hewriter







  이곳은 산간에 터를 잡은 작은 마을입니다. 푸른 잔디가 카펫처럼, 빽빽한 침엽수가 커튼처럼 처진, 멀리 만년설 봉우리로부터 흘러내리는 맑고 시린 냇물이 흐르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죠. 마을의 주 수입원은 양을 치는 일인데, 공기 맑고 물 맑은 곳이라 그런지 양털의 품질이 으뜸이거나와 양젖과 고기도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습니다. 나라에서도 인정할 정도니까요.

  허나 그게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특산품에 대한 나라의 징수가 워낙 부담되니 말입니다. 특히 우리 마을처럼 양질의 특산품은 특별 관리니 뭐니 해서 닦달이 더욱 심하죠. 거둬들이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나라에서 빼앗아 가는 양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니 우리들은 한숨만 늘어갈 수밖에요.

  특히 올해는 작년부터 시작된 이상 기후로 수많은 양이 죽어 나간 터라 수입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는데, 나라에서는 그런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양을 거둬가겠다고 엄포를 하니 살맛 나겠습니까? 그래서 우린 의논 끝에 그 남자를 불렀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 말입니다.

  이 사내에 관한 소문은 무성했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들끓던 쥐 떼를 피리 소리로 홀려 없앴다고 하고, 또 어떤 마을에서는 농작물을 갉아먹는 메뚜기떼를 사라지게 했다고 합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곡식을 피리 소리만으로 쑥쑥 자라게 했다는군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남자를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우리 마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소문의 남자가 오던 날은 하루 종일 기분 나쁘게 스산한 안개가 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일찌감치 우리에 넣었죠. 그런데 두 녀석이 없어진 겁니다. 개를 데리고 찾아 나선다 해도 안개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그 남자가 마을에 들어섰지요.

  우리는 남자의 능력을 시험해볼 겸 잃어 버린 양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남자는 어렵지 않다며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하더군요. 그러자 어디선가 메에-하는 울음소리가 나더니 사라진 두 녀석이 안개를 뚫고 나타난 겁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옛날에는 피리 소리로 곧잘 양 떼를 다뤘다는 어르신들 말씀을 들은지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능력도 보여달라고 했죠.

  남자는 선선히 응했습니다. 그는 안개를 걷어내겠다고 했습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남자의 피리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로 안개가 스물스물 빠른 속도로 걷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놀라는 것밖에 달리 할 게 없었습니다.

  마을의 사정을 들은 남자는 안개를 이용하자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마을로 이어진 길들에 자욱한 안개를 깔아서 징수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계획이었죠.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 남자가 안개를 걷어서 길을 열어주고 말이죠. 그럴듯한 얘기였습니다. 대가가 비싼 건 빼고 말입니다.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곧바로 계약했죠. 처음에 안개를 칠 때 선급으로 2,000스팀을 주고 해마다 1,000스팀씩 더 주기로 했습니다. 비싸긴 해도 나라에서 걷어가는 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죠. 그는 3년간 마을에 머무르면서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안개를 걷어 주고 쳐 주기로 했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가 고혹한 선율로 피리를 불자 걷혔던 안개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안개는 마을을 덮지 않고 산기슭 아래로 흘러가더니 마을 둘레를 장벽처럼 단단하게 막더군요. 그 안에 들어가면 아무도 헤어나지 못할 거 같았습니다. 남자는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안개 사이로 작은 틈을 만들어줬습니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익숙해지니 별문제 없더군요.

  가을에 들어가야 할 세가 소식이 없으니 관리가 직접 찾아옵디다. 남자는 그들이 올 때마다 계곡 전체를 안개의 바다로 만들어서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안개 속에서 헤매다가 피리 부는 남자가 미리 만들어놓은 틈새를 따라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했습니다. 다른 쪽 입구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소용없었죠. 다른 곳도 안개에 막혀 도저히 산을 오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관리는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봄과 여름에도 몇 차례 더 왔지만 그때도 번번이 헛수고만 했죠. 그러더니 3년 째 되던 때부터는 아예 발길을 끊더군요.

  우리는 세금 걱정없이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배에 기름이 두둑해진 탓일까요. 우리는 그만 부려서는 안 될 욕심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계약을 더 연장하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그걸 피리 부는 남자가 거절했습니다. 그는 계약 기간이 다 돼가자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인제 와서 떠나버리면 나라에서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동안 못 가져간 양을 한 번에 다 걷어갈 거라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니까요. 우리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솔직히 화가 좀 났죠. 3년 동안 거액을 지급하고 깍듯이 대접했는데 말입니다. 마을의 건장한 청년들이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허나 일단 회유책을 써야 한다는 의견에 부딪혔죠.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과 마을에서 제일가는 처자를 짝지어 주자는 겁니다. 처자와 혼례를 올리면 그도 마을에 눌러앉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는 우선 남자에게 두 배나 되는 거액을 제시했습니다. 남자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딱 자르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 작전을 쓰기로 했습니다. 남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처자를 들여보냈죠.

  결과는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짐을 들고 떠나려는 겁니다. 마을 청년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고, 곧 마을 사람 모두가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쏘아봤습니다. 그리고 피리를 꺼내더군요.

  누군가 외쳤습니다. 피리를 빼앗으라고. 그가 피리를 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헌데 남자가 더 빨랐습니다. 우리가 남자의 몸에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피리에서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피리 소리를 들은 우리는 나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뒤늦게 귀를 막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몸이 마치 꼭두각시가 된 듯 절로 움직이니 말입니다.

  저는 지금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아니, 헤맨다기 보다는 이리저리 끌려다닌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다른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몇몇은 이미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비슷한 소리를 들었거든요. 게다가 여기는 가파른 길이 많으니까요.

  피리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진짜로 들리는 건지 환청인지 모르겠지만요. 앞으로 피리 소리라면 손사래를 칠 거 같습니다. 앞에 웬 불빛이 번쩍입니다. 아무래도 산짐승 같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가 봅니다. 늑대군요. 늑대가 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피리 소리가 멈췄군요. 피리 소리가 멈췄어요.





이 작품은 @kimsursa님의 [동화의 재해석] 이벤트 응모작입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다른 동화가 영화나 드라마로 여러 번 재해석 될 동안 이 이야기만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제가 한 번 써 봤습니다. 나름 다크 히어로의 원조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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