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더위로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저 에어컨이 켜진 건물만 찾아다니며 늘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메마른 땅바닥을 하루 종일 삽으로 파내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 일이다. 이 책은 주인공 스탠리가 바로 그 개고생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덩치만 컸지 속은 여린 중학생 스탠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둑으로 몰린다. (하지만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의 고조할아버지가 남의 집 돼지를 훔치다가 들켜서 저주를 받은 후부터 스탠리 집안은 대대로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판사는 그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초록 호수 캠프(Green Lake Camp)’라는 청소년 교화센터로 보내게 된다. 가난해서 평생 ‘캠프’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스탠리와 가족들은 이것도 나름 ‘캠프’니까, 라면서 위안을 삼아 본다. 한데, 막상 도착한 곳은 초록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메말라 버린 드넓은 호수 바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탠리는 땅에 구덩이를 파야 했다. 그냥 작은 구덩이가 아니라, 깊이도 5피트(대략 1.5m), 사방도 5피트가 되도록 깊게, 넓게 파야 했다. 매일매일, 18개월 동안 말이다. 아, 내가 말했던가? 스탠리가 사는 이곳은 태양이 뜨겁기로 유명한 텍사스다.
도대체 이 청소년 교화센터의 소장은 왜 텍사스의 땡볕 속에 땅에 구덩이를 파는 게 아이들의 삐뚤어진 성격을 교화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땅을 꼭 파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뜨거운 땡볕, 맛없는 음식, 냄새나는 잠자리,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날마다 날마다 파야하는 구덩이. 남의 집 돼지를 훔치다가 스탠리 집안에 저주를 불러온 100년 전 고조할아버지는 자기가 받은 저주 때문에 스탠리가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까?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스탠리는 고조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이게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돼지 도둑 고조할아버지 때문이었다! (It was all because of his no-good-dirty-rotten-pig-stealing-great-great-grandfather!)" 그런데, 그 고조할아버지는 정말 남의 돼지를 훔쳤던 걸까? 세상에 정말 저주라는 게 있을까?
출처: 교보문고
별로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는데, 읽어보니 굉장히 재미있다. 무더위 속에 하염없이 구덩이를 파게 된 스탠리 이야기와 고조할아버지가 나오는 100년 전의 이야기가 교차해서 나오는데, 서로의 얼개가 맞아가면서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의 스탠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이 나올 때면 마치 타임슬립 소설을 보는 듯한 쾌감도 있다. 저자의 말로는 자기 인생이 저주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느끼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정말 저주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푸념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언제나 자기만 억울하고, 나만 불행하고, 불운은 나만 따라오고. 하지만 부모 탓, 조상 탓을 하면서 불평을 늘어놔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You are here on account of one person. If it wasn't for that person, you wouldn't be here digging holes in the hot sun. You know who that person is?"
"My no-good-dirty-rotton-pig-stealing-great-great-grandfather."
...
"No," said Mr. Pendanski. "That person is you, Stanley. You're the reason you're here. You're responsible for yourself. You messed up your life, and it's up to you to fix it. No one else is going to do it for you."
"네가 여기에 있는 건 한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네가 이 더운 뙤약볕 아래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지 않았겠지.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돼지 도둑 고조할아버지요."
...(중략)
"아니야." 펜덴스키 씨가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너야, 스탠리. 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야. 너에 대해서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네가 인생을 망쳐놨으면 그걸 고치는 것도 너한테 달린 거야. 어느 누구도 널 대신해서 해줄 사람은 없어."
과거는 참 좋은 핑계다.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바꿀 수도 없으니까. 나는 그저 거지 같은 내 운명을 탓하며 피해자인 척 투덜거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실마리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현재를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길을 찾을 수도 있다.
Nothing in life is easy. But that's no reason to give up.
삶에서 쉬운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게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
이 책은 <홀즈(Holes)>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평도 좋다. 책의 저자가 시나리오 작업도 직접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아동도서를 쓴 작가에게 수여하는 뉴베리 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중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른이 읽어도 너무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다.
한국어판 제목: 구덩이
영어 원서 제목: Holes
저자: 루이스 새커 (Louis Sachar)
특이사항: 뉴베리 수상작. <홀즈>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