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난무하던 1964년 미국의 남부. 14살 된 백인 소녀 릴리는 어려서 엄마를 여의고,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아빠 밑에서 홀로 쓸쓸히 자라 왔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흑인 로잘린이 그녀에겐 가장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만다. 드디어 흑인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지만, 이를 아니꼽게 보던 백인들이 투표인 서명을 하러 가던 로잘린에게 시비를 걸어 폭행을 한 것이다. 고개 숙일 줄 모르는 로잘린의 태도도 백인들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릴리는 아빠에게서 그 백인들이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며, 어쩌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로잘린을 찾아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 덜컥 겁이 난 릴리는 병원에서 로잘린을 빼돌린 후 함께 도망을 친다. 로잘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쩌면 억압적인 아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엄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엄마의 고향이 어딘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엄마의 고향으로 향하던 릴리는 어느 마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만다. 가게에서 파는 벌꿀 통에 "흑인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검은 성모상 그림에 마음을 빼앗긴 릴리.
I felt she knew what a lying, murdering, hating person I really was. How I hated T. Ray, and the girls at school, but mostly myself for taking away my mother.
I wanted to cry, but then, in the next instant, I wanted to laugh, because the statue also made me feel like Lily the Smiled-Upon, like there was goodness and beauty in me, too. Like I really had all that fine potential Mrs. Henry said I did.
Standing there, I loved myself and I hated myself. That’s what the black Mary did to me, made me feel my glory and my shame at the same time. (p. 71)검은 성모상은 내가 거짓말쟁이이고, 살인기가 있으며, 끔찍한 사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얼마나 아빠와 학교 친구들을 미워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없어진 원인인 나 자신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울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는 웃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검은 성모상은 내가 ‘사람들이 보고 미소 짓는 릴리’가 된 듯이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마치 내 안에 선함과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마치 헨리 선생님이 말한 그 모든 훌륭한 잠재력을 내가 진짜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 선 채 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를 증오했다. 검은 성모상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내 영광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알고 보니 그 마을에는 직접 양봉을 하며 '검은 성모상' 라벨을 붙인 병에 꿀을 담아 파는 흑인 달력 자매들이 있었다. (달력 자매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자매들 이름이 8월, 6월, 5월 ㅡ August, June, May였기 때문이다.) 결혼도 안 한 흑인 세 자매가 벌을 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그 집에 외지 사람 로잘린과 백인 소녀 릴리까지 기거하게 됐다.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양봉일을 도우면서 릴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엄마의 죽음에 자신의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죄책감,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긴 했을까 하는 서러움. 릴리는 이런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After you get stung, you can’t get unstung no matter how much you whine about it. (p. 167)
벌에 일단 쏘이게 되면, 내가 아무리 징징댄다 한들 쏘이기 전으로 되돌릴 순 없다.
출처: 교보문고
세 자매의 맏언니인 오거스트는 인생에서 우러난 조언들로 릴리에게 '어른'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미국에서 이 책이 유독 인기가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오거스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인생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그런데 오거스트는 다르다. 많이 다르다. 오거스트는 독신의 중년 흑인 여성이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했고, 학교 선생님을 지낸 적도 있다. 지금은 삶의 독립성을 훼손당하기 싫어서 결혼도 거부한 채 양봉일을 하며 두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1964년의 미국 남부에서 말이다.
“Didn’t you tell me this past week one of the things you loved was bees and honey? Now, if that’s so, you’ll be a fine beekeeper. Actually, you can be bad at something, Lily, but if you love doing it, that will be enough.” (p. 167)
“너 나한테 벌이랑 꿀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바로 지난주 아니었니? 그게 사실이면 넌 멋진 양봉가가 될 거야. 사실 뭔가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릴리야, 만일 그게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걸로 된 거야. 충분해.”
“You’ve been halfway living your life for too long. May was saying that when it’s time to die, go ahead and die, and when it’s time to live, live. Don’t sort-of-maybe live, but live like you’re going all out, like you’re not afraid.”
…
“Like May said, it’s your time to live. Don’t mess it up.” (p. 211)"넌 너무 오랫동안 이도 저도 아니게 살고 있잖아. 메이도 말했었지. 죽을 때가 되면 어서 죽으라고. 그리고 살 때는 살라고. 그냥 대충 어영부영 사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다 걸듯이, 하나도 두려운 게 없다는 듯이 살라고."
...(중략)
"메이가 말했듯이, 이젠 네가 진짜 살아가야 할 시간이야. 그걸 망치지 마."
“There is nothing perfect,” August said from the doorway. “There is only life.” (p. 256)
“아무것도 완벽한 건 없어.” 오거스트가 문간에 서서 말했다. “단지 삶이 있을 뿐이야.”
이 책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종차별을 질타하는 이야기도 될 수 있고, 벌들의 생태에 관한 책으로도 볼 수 있으며(실제로 벌에 관한 정보가 꽤 많이 나온다), 어린 소녀의 성장기, 혹은 여성들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책 전체를 줄 치고 싶을 정도로 멋지고 깨달음을 주는 말들이 가득 들어있다. 당신의 나이가 몇 살이건, 성별이나 인종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이, 당신도 '자아'를 찾아가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기 바란다.
한국어판 제목: 벌들의 비밀생활
영어 원서 제목: The Secret Life of Bees
저자: 수 몽 키드 (Sue Monk Kidd)
특이사항: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100주 이상 머물렀었다. 다코타 패닝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포스터. 출처: 다음영화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덧) 지금 글 올리면서 찾아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고 나오네요. 참 좋은 책인데. ㅠ.ㅠ 혹시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서 보시길 권합니다. 전 영화는 못 봤는데 영화평도 좋더군요. 아쉬운 대로 영화를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