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
그 위선적인 말들을 이경은 기억한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이에게 이경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수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수이는 말했다. 무엇이 수이를 체념에 익숙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이경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라니, 그것이 버림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_본문에서
_최은영, 그 여름
소설집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이다.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난 후 감정이 살아있는 문체와 감성이 좋아 그녀의 다른 책을 찾던 중 만나게 된 작품이다. 2016년 ‘21세기 문학’ 겨울호에 실렸던 소설을 단행본으로 옮긴 책이다.
이야기는 고등학생 이경과 수이의 첫 만남으로 시작한다. 하굣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이경은 날아온 공에 맞아 다치게 된다. 안경이 부러지고 코피까지 날 정도의 부상이었다. 공을 찬 사람은 축구부의 이수. 이수는 서둘러 이경을 양호실에 데려가기도 안경점에 함께 간다. 이것을 인연으로 둘은 가깝게 지내게 되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몇 번의 만남 후 둘은 어느새 연인사이가 됐다.
영원할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랑. 이별의 조짐은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이경은 자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수이가 불만이었다. 조금은 자신에게 기대길 바랐지만 수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것을 감추며 스스로 해결해 나갈 뿐이었다. 이런 수이의 태도는 이경을 점점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경 앞에 나타난 은지. 매력적인 은지의 모습에 이경은 점차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이경은 수이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수의 모습이 이경은 멋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경은 이수의 그런 모습에 서서히 지쳐갔을 것이다.
사랑은 표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거 같다. 이수가 조금 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면, 힘들다고 이경에게 잠시 기대왔다면 둘의 사랑은 계속 됐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것도 모른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님 다른 무엇이든.
그래서일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은지에게 끌렸던 이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이경은 이수를 사랑한다. 이수도 이경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이경은 이수에게 묻는다. 날 사랑해? 어쩌면 당연한 걸 묻는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책의 아쉬운 점은 분량이 매우 적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쌌다. 전체 페이지가 150장은 됐지만 그마저도 한쪽은 영어로 번역되어 있어 실상 내가 볼 수 있는 건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쇼코의 미소에서도 보여줬지만 작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관계가 안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이 작품 역시 두 사람의 사랑과 갈등을 숨김없이 잘 보여준 책이다. 그리고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