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_본문에서
_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작가 소설 중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몇 번 그의 다른 소설을 본 적 있지만 정서와 안 맞아서인지 매번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핑계에 불과하고 지금보다 혈기왕성할 때라 책보다는 조금 더 재미있는 걸 찾아 나섰던 것 같다. 하여튼 김영하 작가의 소설 중 끝까지 다 읽은 건 이 책이 최초다.
소설의 화자인 김병수는 70세 고령의 노인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노인은 25년 전 꾸준히 살인을 저질러온 연쇄살인범이다. 이런 그도 세월은 막지 못하는지 현재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갈 뿐이다.
그에게는 은희라는 딸이 있다. 은희는 알츠하이머 환자인 아버지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해나간다. 그러던 중 은희는 애인인 박주태를 병수에게 소개하게 된다.
병수는 박주태를 보자마자 자신과 같은 살인자라는 걸 직감한다. 그가 은희와 함께 있는 것 또한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서라는 걸 예감한다. 결국 병수는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살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책은 몰입도가 굉장히 높다. 만약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면 정말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간결한 문장과 길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70세 노인인 병수의 속도에 맞춰져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최근 살인자의 기억법이 영화로 개봉되면서 원작 또한 다시금 주목받게 됐다. 김병수 역에는 설경구, 은희 역에는 가수 설현, 그리고 박주태는 김남길이 연기했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소설 속 인물들과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미지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영화평이 나쁘지 않으니 책이 힘든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꽤 흥미로운 반전도 있으니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