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쇼코의 미소 by 최은영 - 이별과 기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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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vimva 님이 주관하시는 북클럽 9월의 책 "쇼코의 미소"를 보고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출처: 교보문고



일단 표지 얘기부터 하고 들어가야겠다. 은은한 파스텔 톤 분홍색 표지 위에 한 여자가 서있다. 얼굴을 감춘 채 옆으로 돌아선 그녀는 잠깐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편안한 옷차림이다. 여자라면 더군다나 20대 여자라면 예쁘고 섹시하거나, 귀엽고 애교가 많거나, 구김 없이 밝고 명랑해야 대접받는 대한민국에서 그녀는 이렇듯 무심하게, 우울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다. 마치 선영이나, 현주, 미옥이 같은 흔해빠진 이름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볼 것처럼.

이 책에는 제 5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표제작 "쇼코의 미소"를 포함해서 모두 일곱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 독후감을 쓸 때는 책의 간략한 줄거리를 함께 쓰는데, 단편소설은 그게 어렵다. 각각의 단편에 대한 줄거리를 다 적게 되면 글이 너무 길어지게 될 뿐더러, 짧으면 3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도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에서는 전체적인 감상평을 적어볼까 한다.

이별과 기억

내가 생각하기에 이 단편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별과 기억이다. 책에서는 많은 이별이 나온다. 친구와의 이별, 애인과의 이별, 가족과의 이별, 마음의 안식처와의 이별, 과거와의 이별. 본인의 부주의로 혹은 편협한 아집으로 이별을 겪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이나 인혁당 사건, 세월호 참사 등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파도 속에 이별을 하기도 한다.

이별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일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이별이 삶 속에 불쑥 튀어나오면 그녀들은 그걸 다시 정리하려 애쓴다.

그런데 이별이라는 것이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다 나은 듯해도 비만 오면 쑤시는 무릎처럼, 활달하게 지내다가도 누가 볼세라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가리는 흉터자욱처럼. 잊을 수도 없고, 잊히지도 않는, 하지만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망령은 그렇게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녀들은 이별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왜 기억해야 하는지, 각자의 방식으로 깨닫는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책을 읽으면서 잔인한 허리케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 내 안을 휘젓고 들어와 저 깊은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것까지 모두 백일하에 드러내놓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나의 망상들.

그런데 묘한 건, 그렇게 나의 민낯을 직시하게 만들면서도 이 책이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마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랬어. 우리 모두 그래."라고 다독여주듯이.

그녀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

이 책은 여성들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이 주로 20대 여성이라는 점은 그녀들에게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공감을 넘어 동일시의 경험까지 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20대 여성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남녀에게 권하고 싶다. 책에 나온 등장인물들은 한때의 나였으며, 지금의 그녀들이고, 바로 당신 옆에 있는 선영이, 현주, 미옥이니까.

책을 읽으며 당신도 위로를 받기 바란다. 내가 그랬듯이.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마디

1

쇼코는 ‘언젠가는’이라고 말했다. 열일곱 살에도, 스물세 살에도.
언젠가는 도시로 나갈 거고, 언젠가는 한국을 일주일 동안 여행할 거고, 언젠가는 남자와도 함께 살아볼 거고, 언젠가는 병원을 관둘 거고, 언젠가는 고양이를 키울 거고, 무엇이든 해보리라고 내게 이야기했다. (p. 9 쇼코의 미소)

언젠가는. 희망의 단어 혹은 무책임한 단어.

2

이미 직장에서 대리급이 된 친구들과는 돈 씀씀이가 확연히 달라졌고 그애들은 내가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친구들의 배려였지만, 그런 작은 일들 하나하나가 자존심을 긁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들은 주말이면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고, 틈틈이 책을 읽었지만 나의 독서량은 그애들보다도 빈약했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알코올중독자가 된 감독 지망생과,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며 야근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나리오작가 지망생을 보며 내가 그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p. 33 쇼코의 미소)

3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나는 천천히 말했다. (p. 86 씬짜오, 씬짜오)

4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 89 씬짜오, 씬짜오)

5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들을 없었던 것처럼 쉽게 쉽게 묻어버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건지. 그래서 그 앞에는 뭐가 있는 건지. 그 앞에 뭐가 있기에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짓들을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잊은 채 살아가야 하는 건지. (p. 111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6

난 스물일곱이야, 라고 말하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부모도,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아이를 낳은 언니도, 지도교수와 연구실 사람들도 그랬다. 이십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해야 할 시기였고, 여기서 치열함이란 죽기 살기로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경력을 쌓은 것을 의미했다. (p. 128 한지와 영주)

7

대학원이라는 좁은 사회로 진입하면서 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대학원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 내 태도가 굉장히 유아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여자는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한 번 뒷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나는 밥먹듯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꽤나 그 룰을 잘 따라왔다고 믿었다. 수업과 답사에 적극적이었고 뒤풀이에도 참석해서 늦게까지 웃고 떠들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아무 이유 없이 울었다. (p. 136 한지와 영주)

8

“아가씨. 내 딸도 그날 배에 있었어요.”

“내 딸을 잊지 마세요. 잊음 안 돼요.” (p. 236 미카엘라)


한국어판 제목: 쇼코의 미소
저자: 최은영
특이사항: 제 5회 젊은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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