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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집권 초기 박정희 정부는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정치적 원죄를 해소하고, 무언가 자신이 소위 '구국의 결단'을 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순신을 정책적으로 성역화하고 (물론 이순신 장군께서 신화급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스스로를 이순신에 빗댄 행위를 보면 잘 드러납니다.
그 자신이 살아온 인생 여정을 보면 남로당에서 시작하여 일제 장교에 이르기까지, 박정희라는 인물은 딱히 사상적으로 어딘가에 단단한 자리를 내린 사람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엄청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처럼, 철저히 강자의 편에 서서 승자가 되는 것에서 희열을 느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집권 후에도 일본군 장교 시절의 군복을 입고 말을 달렸다는 기록에서 손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그 기억은 '승리'의 기억이기 때문이죠. 이걸 불행이라 생각할지, 다행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박정희라는 개인에게 일본은 그리 악한 존재도 아니었고, 거부해야 할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유명한, 아직까지 욕을 신나게 들어먹는, 한일 협정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필요했던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요?
박정희는 1963년까지는 장면 정권의 경제 개발 계획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다 1964년 계획부터는 '보완계획'을 통해 독자적인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사실상 박정희 정권이 무언가 한 것은 여기부터입니다. 그런데 역시 이 보완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이 더 이상 차관을 제공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수출액이 올랐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해볼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이 찾아낸 것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프레이저 리포트를 비롯해서 다양한 부분에서 박정희 정권과 경제 발전에 있어 미국의 역할이 강조되었지만, 사실 미국 내에서 한국에 원조를 한 물자들은 대부분 대중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미국님이 그럴리가 없으십니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은 사료를 가지고 별개의 포스팅으로 후술하겠습니다.
한편, 한국 전쟁이라는 전쟁 호황을 바로 옆에서 제대로 빼먹은 일본은 빠르게 2차대전의 패배에서 벗어나 중화학 중심의 경제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중화학 공업은 47%에서 73%로 빠르게 증가한 반면, 경공업의 경우는 44%에서 21%까지 줄어들었죠. 달러를 긁어 모으면서 상대적으로 경공업 부문에서의 수요를 수입으로 채워야 했던 일본은 이제 갓 수출 시장에 뛰어든 한국에겐 더할나위 없이 반가운 판매 루트였습니다.
일본 자동차 공업 재기에 한국전쟁 특수는 구세주가 되었었죠
실제 국교 수립 이전인 1963년부터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팔 수 있는게 무엇이고, 일본에서 들여올 수 있는 노동집약적 공업이 어떤 것이 있을지 찾기도 했으니까요. 당시 전경련 사무국장 김입삼씨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가 친일파였기 때문에 한일협정을 맺고 한국 경제를 대일 종속화 시켰다."고 말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는 사실과 좀 다릅니다. 박정희가 반일보다 친일에 가까운 것도 맞고, 한국 경제가 일본에 심하게 종속 된 것도 맞으며, 자체 생산보단 OEM 산업 중심으로 산업 체계가 구성되어 선진국 반열에 뛰어들기 힘든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서로간의 인과관계를 구성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1960년대 전반 개발 전략의 전환과 그것의 경제사적 배경」을 쓴 이영훈은 정권이 아니라 시장에서 일본의 수요를 이용한 시장에서의 보세가공 움직임이 먼저 있었고, 당시 한국에는 값싼 노동력이 많았을 뿐인거죠. 물론,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거기에 OEM을 맡기는 이런 일본 자본의 의도가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연상시킨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초기 박정희 정권은 오히려 굉장히 축소된 무역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65~66년 계획과 실제 차이를 비교해 봅시다.
그 와중에 베트남에 내다 팔면서 상당히 재미를 봤던 철강 산업을 보다 더 크게 발전시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박태준과 함께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 문제가 턱하고 생기게 된 것이죠. 세계은행은 "한국 기간 산업에 채산성이 없다"며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차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끊긴데다 아직까지 수출액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본격적으로 OEM 산업을 돌릴 경공업 베이스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65년 수정 계획 초기 안을 보면 이전 정부 계획안 대비 극명하게 축소된 잡제품(경공업) 수출 실적 계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는 박태준의 아이디어지만,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금을 쓰자는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외환(달러)이 모자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자기가 생각하기엔 엄청난 규모의 차관을 일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걸로 퉁치자 하면서 뽑아먹었던거죠. 한일조약의 뒤에는 포스코가 있었고, 그 포스코는 박정희와 박태준이 작정하고 피해자한테 갈 돈을 빼앗았다고 봐도 됩니다. 일본은 외려 피해자들에게 직접 배상금을 지급하길 희망했다는게 유머 포인트겠네요.
박태준 뿐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준 이른바 '관민 합동 체계'의 또 다른 핵심 멤버는 바로 삼성의 이병철이었고, 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전문 관료들이었습니다. 한국과 똑같은 출발선에서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던 버마나 태국, 필리핀과 달리 한국이 뛰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전문화된 관료집단과 민간의 유대관계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경제기획원에 엘리트들이 죄다 포진되어 있었다 해도 됩니다.
물론 삼성은 이후 이런 관료들을 영입해서 소위 말하는 '관리의 삼성'을 만들고 지금에 이르긴 합니다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겠네요. 박정희 정권의 초기 경제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승만 정권이 깔아둔 합판/철강 산업
- 마침 물건을 내다 팔 남베트남 시장
- 전쟁 배상이라는 카드를 꺼내 써서 일본의 자본을 널름 집어먹은 멘탈(...)
- 대의를 위해 한국 피해자를 화끈하게 무시해버린 군대 스타일
- (정치자금을 받고) 이병철 등 민간 자본을 밀어줌
- (의외로) 경제기획원에 수많은 전문 관료를 밀어넣고 독자성을 보장해 줌
이렇게 놓고 보니 6번 빼면 잘 했다고 할 만한게 없기도 합니다. 뭐 그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하고 김재익에게 모조리 다 떠넘겼던 전두환도 비슷해요. 소위 멍게(멍청하고 게으른)형 리더가 도움이 된다고 할 때도 있는데, 바로 전문성이 없었던 이런 면에서 어설프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먼저 숙이고 들어간게 주효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좀 지나, 멍부형 리더(멍청하고 부지런한)를 잘못 만나면 어떤 대 참사가 발생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됩니다. 바로 1997년 다가온 IMF 금융위기였죠.
대항해시대 후반 네덜란드가 거덜란드 된 이야기는 좀 더 사료를 모아서.. 윽윽... 튤립 이야기에서 증권과 옵션의 발달까지 정리를 해야 하는지... 머리속에서 아직 뭐가 잘 안 서네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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