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주의]
안녕, 형들. 주말이라 다시 돌아온 깨알 같은 문학이야. 지난번에는 아동용 문학으로 찾아왔었지. 요즘 내가 읽는 거나 생각나는 책으로 찾아오려 했는데, 하필 유독 무겁고 심각한 책들이네. 그런데 요즘 날씨가 너무 습하고 덥잖아? 가능한한 가볍고 쉬운 책을 선정하려고 해. 그래서 오늘도 그런 걸 갖고 왔어.
지난 번에 갖고 온 소공녀(A Little Princess)는 소녀가 주인공이다보니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더 많이 읽는 아동용 문학작품이었지. 이번에는 아래 짤과 같은 사춘기 소년이 주인공이야.
13, 3/4세 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1985).
이 사춘기 소년이 등장하는 책은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이고, 그 중 총 세 권이 영국에서 TV시리즈로 만들어졌는데, 해리 포터의 외모 컨셉을 정할 때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닐까 할 정도야. 이것 역시 영국 작품이고, 수많은 영국인들이 이 책을 읽거나 TV 시리즈를 시청했으니까. 심지어 소년의 여자친구조차, 그 해리 포터 옆의 여자아이와 비슷한 스타일임.
어쨌든... 이 사춘기 소년은 주인공일 뿐 아니라, 저자이기도 해. 물론 책의 실제 작가냐 하면 그건 아니야. 무슨 얘기일까? 작품의 화자가 이 사춘기 소년이라는 얘기지. 바로 일기 형식이야. 사춘기 소년의 눈으로 본 가정의 불화, 부모님의 별거와 재결합, 첫사랑과 좌절, 여드름, 재능, 자신을 괴롭히는 힘센 학생에 대한 고민을 다루고 있어. 아니, 다룬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진 않아. 말 그대로 일기니까, 그냥 화자인 소년이 느끼는대로 줄줄 써내려간 것이지.
일기를 빙자하는 일부 소설들의 최대 약점은 바로, 말은 일기라면서 꼭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쓴 부분이 많다는 거야. 반면 이 에이드리언 몰 시리즈는 일기인 척 하는 소설에서 보이는 과한 부연설명을 넣지 않고 대부분 정말 일기처럼 썼다고 할 수 있지.
이 일기 시리즈의 실제 작가는 수 타운젠드(Sue Townsend)라는 여성이야. 이 작가는 에이드리언 몰의 성장과정을 넘어 성인의 삶까지 쭉 시리즈를 냈어. 물론 죄다 에이드리언 몰이 쓴 것으로 된 일기 형식이지. 타운젠드는 이 에이드리언 몰 시리즈만으로도 엄청 유명해졌어. 비밀 일기...라는 형식의 책 중에서는 바로 이 에이드리언 몰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
시리즈의 첫 타자는 13, 3/4세 에이드리언 몰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Adrian Mole, Aged 13 3/4)라는 제목이야. 3/4는 영어로 three quarters라고 읽으면 돼. 제목에서부터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하는 화자의 마음이 읽히지? 13세 하고도 4분의 3이라는 거야. 한국어로는 13세 하고도 3/4라는 걸 한 마디로 표현하기 좀 힘든데, 사실 정확한 국내 제목은 뭐라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엔 에이드리언 몰의 성장통(The Growing Pains of Adrian Mole), 등등으로 시리즈가 계속 나왔어.
출간 당시의 주요 독자층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이드리언 몰과 비슷한 나이대였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사춘기 소년이 화자이긴 한데, 읽는 사람이 나이를 꽤 먹은 성인일 때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더라고.
에이드리언 몰은 80년대에 10대, 90년대에 20대, 2000년대에 30대인 캐릭터야. 극히 개인사로 이루어진 일기 같지만, 주인공/화자가 처해 있는 사회적 배경을 굉장히 가깝게 느껴볼 수 있어.
10대에는 참전 용사와 외국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대영제국에서 쪼그라든 영국의 모습을 느낄 수 있지. 20대에는 이런저런 현실의 벽과 본인의 평범한 능력 때문에 겨우 살아가는 애환을 엿볼 수 있고, 30대에는 노동당 집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별다른 거 없이 덜컥 아들 하나를 얻게 되고, 덜컥 이혼당해서 혼자 키워가는 모습이 그려져. 그래서 30대의 일기를 엮은 책 제목은 '카푸치노 세월(The Cappuccino Years)야. 거품이 많고, 커피는 적다...는 대사가 나오지. (조만간 TV/영화 포스팅을 시작해서 꾸준히 써보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아마 이 에이드리언 몰 TV 시리즈들을 한번 다룰 것 같아. 내 TV 포스팅 시리즈는 가즈아로 쓸지 일반으로 쓸지 아직 고민중이다.)
나는 아직 외국에 가기 전, 한글로 이 책을 읽었는데, 그러니까 에이드리언 몰보다 훨씬 어릴 때의 일이지. 그 당시의 내 눈에는 이 소년이 평범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어. 이 소년이 겪는 신체와 호르몬의 변화, 그에 따른 어설픈 감정 표현과 행동은 유치원 졸업반쯤 되는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서 본 적이 없는 것이었고, 내게도 의아한 문제들이었으니까. 성인들이 등장하는 일반 소설을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 성인들의 행동 배경과 동기 등등은 항상 공감은 아니라도 이해는 되었는데, 사춘기 아이의 세계관은 뭔가 이상하기만 했어.
가령 시리즈 초기에 에이드리언 몰이 갖고 있는 피부 고민 같은 것도,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의 내게는 직접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었지. 또 짝사랑했던 여자아이와 사귀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까지는 이해가 갔는데, 그 여자아이가 그 전에는 절친과 잠깐 사귀었었거든. (어린 내 눈에는 그게 아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에이드리언 몰이 전달하는 내용에선 뭔가 정체 모를 찝찝함이 느껴졌어.) 그리고 그 절친은 아무래도 남자가 더 좋은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하지. 부모님은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데, 단순히 생각해서 재결합 했으면 좋은 거잖아? 그런데 아주 어린 아이, 또는 반대로 아예 성인들의 표현으로 미화된, 그런 재결합 스토리의 느낌이 아닌거야. 불안하고 찝찝했지.
하여간 많이 어릴 땐 그런 크고 작은 사건들의 중요성을 정확히 몰랐었는데, 나중에 실제로 사춘기에 접어들고 나서야 에이드리언 몰의 사소한(?) 고민거리들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었었어.
그러나 에이드리언 몰 시리즈는 절대 어둡거나 무겁지 않아. 웃을 일이 아주 많이 널려 있지. 에이드리언 몰이 어릴 때는 그의 순진함 때문에, 독자는 무슨 상황인지 알겠는데 그 자신은 잘 모르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웃음 포인트가 숨어 있어. 주인공/화자가 나이가 들어서도, 그건 마찬가지야. 남들보다 약간은 더 바보 같고, 약간은 더 순진하고 모자란듯한 인물이니까. 신랄한 표현도 일기에서 많이 쏟아내지만, 찌질함을 넘어서는 어떤 행동력을 보이진 못해.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본 독자들은 에이드리언 몰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을 보고 많이 웃어왔고, 그래서 애정을 갖고 바라보게 돼.
오늘은 배경 설명이 길었는데, 깨알 같은 포인트 하나로 축약해보자. 비밀 일기라는 소재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짝사랑이야. 에이드리언 몰의 사춘기 이래로 평생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판도라라는 여자아이인데, 분명 짝사랑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첫사랑이자, 첫 여자친구가 되지.
사실 판도라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에이드리언 몰에게 과분해. 예쁘고 공부도 잘 하며, 집안도 부자야. 야망도 커서, 나중에는 하원의원까지 되지. 그런데 시리즈 초기에 이 둘은 꽤 오래 사귀어. 아마 그렇게 어린 시절의 판도라는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의 감수성을 좋아했던 것 같아. 에이드리언은 가엾게도 평생 판도라를 결코 완벽하게는 잊지 못하게 되고, 한때 가까웠던 동창이자 친구로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게 되지만, 그걸 떠나서 그의 인생은 계속 돼.
오늘은 딱히 질문이랄 건 없어. 자신의 사춘기/학창 시절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를 남겨주면, 그 중 재미있는 사연을 선택할게!
그럼 이제 지난 회차 이야길 할 차례야. 소공녀에서, 주인공 소녀의 신세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대접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을 봤었지? 그리고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했었어.
내 경우는 크게 심하게 겪은 일은 없고, 그냥 떠오르는 일은 있었어. 한국의 어느 여대에서 인문대 강의를 들을 때의 일이야. 첫 수업부터 조를 짜는 경우가 자주 있잖아? 강의하시는 교수님도 나를 잘 알고, 수업에 참여하라고 허락하신 상황이었는데, 처음 만난 학생들은 그런 걸 전혀 모르잖아. 사실 나랑 같은 조가 되면 일단 인문대 수업은 엄청 편해지는 거였거든.
근데 막상 조를 짜는데 뭔가 느낌이 날 기피하는 거야. 예의를 차리거나 조심하는 척 하면서 말이야. 3~4명의 아이들이 나랑 근처 자리에 앉았단 이유로 같은 조가 될 상황이었는데, 뭔가 발표 시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처럼 취급을 하는 거지. 왜 그랬냐면 나는 당시에 높은 구두를 좋아했고 항상 치마를 입었거든. 머리나 화장은 그때도 잘 안했는데, 원래 생머리라 삐딱하게 보려면 엄청 관리한 걸로 볼 수도 있었을 거야. 암튼 내 첫 인상은...공부에는 관심 없고 그래서 그냥 무임승차할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 같애.
아, 나는 다 필요없고 그냥 내가 다 자료 찾고 쓰고 발표하고 싶으니까 그냥 내가 보내주는 내용 그대로 파워포인트나 해주면 그만이었거든. 그래서 1학년 한 명을 지목해서 따로 조를 짜서 나갔지. 딱 두 명이서 말이야. 그리고 나서 발표 시간에 그 아이들한테 복수했다. ㅎㅎㅎ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결과적으로...ㅎㅎ그때 봤지. 태세전환을. 그리고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을 때 또 봤음. 비록 내가 소공녀 주인공처럼 처지 자체가 바뀐 상황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갖고 있는 어떤 선입견이 있을 때와 깨졌을 때 태세전환하는 것은 충분히 많이 본 것 같아.
여러 형들이 그런 경험을 넘어, 진짜로 외부 조건이 바뀌었을 때 주변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것 같더라. 하지만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라 나누진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중에서 가장 질문에 충실하면서도 뚜렷한 답변을 준 @urobotics형의 댓글에 소정의 보팅을 할게(지금 뭔 일인지 보팅 오류가 나니깐 나중에 확인해! 아, 댓글도 7일이 지나면 안 되는 건가? 다시 댓글 주면 거기다가 할게.). 개인사라 여기서 다시 묘사하진 않겠어!
그럼 이번 회차에서 좋은 사연(?)이 나오길 바라며, 축구 관람도 잘 하고 시원한 여름 밤들 보내. 다음 회차까지 안녕!
의리에 죽고 살아서 이런 후문도 써주는 @jamieinthe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