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생중계를 하던 미국 방송사의 해설자가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던 국가지만, 모든 한국인은 발전과정에 있어 일본이 문화, 기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국내외 네티즌들은 즉각 '망언'이라며 사과를 요구했고, 미국 방송사는 "한국인들이 모욕감을 느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사과성명을 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며칠 지나면 이번 사건은 기억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 미국인의 주장은 정확히 '식민지근대화론'의 골자다.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박근혜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던 뉴라이트 역사관의 압권이 바로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인은 할 수 없었는데,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에 철도를 놓고, 항구를 만들고, 공장을 짓고 어쩌구저쩌구 해서 한국 근대화의 맹아가 형성됐다는 거다.
이번 사건은 이런 주장이 일본과 한국을 넘어, 미국에까지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서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일본에서야 극우파들의 단골 레퍼토리니까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의 역사교과서까지 이런 논리로 기술하려 했다는 것이 참담하다.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방귀께나 뀐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가 알게 모르게 적지 않다.
우리 현대사에서 친일파는 단죄를 받은 적이 없다. 다 알다시피, 해방 뒤 그들은 여전히 지배세력으로 살아 남아, 권력과 돈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죽여도 살인죄로 사형당하거나 평생을 감방에서 보내야 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잠시 감옥생활을 하는 듯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포병장교로 복귀했고, 종전 직전 완전복권돼 대명천지를 활보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국민과 역사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친일파 권력자들의 안하무인 뻔뻔스러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그런 토양속에서 싹트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주장을 대놓고 처음 제기한 사람은 서울대 경제학과 안병직교수였다. 그는 60년대 박현채 교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를 읽고, 신영복 선생, 김수행교수등과도 교분이 깊은 진보적 성향의 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90년대 초중반 느닷없이 `일제가 밉다고, 일제 식민지배 시기에 한국 근대화의 기초가 닦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며, 한국의 '내재적 발전론'을 사실상 부정했다. 학계는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등이 비판에 나섰지만, 그의 제자 이영훈교수가 반비판에 나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안병직은 그 뒤 뉴라이트의 정신적 지주가 됐고, 한나라당 연구소 소장을 맡기도 했다.
그래, 다 좋다.일제가 철도도 놓고 항구도 만들고, 봉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의 행정제도도 근대 자본주의 형태로 한단계 발전시켰다고 치자, 그래서 경제도 연평균 3.9% 성장했다 치자. 그런데 일제가 왜 그렇게 했겠나? 그 수혜를 누가 봤나? 결국 우리민족은 수탈된 거 아닌가? 그래서 이완용과 일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뭘 말하고 싶은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