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말 말고 일단 외관만 보자. 음..
변기왼쪽에 R.mutt라는 뒤샹이 사인이 보인다. 뭐 이 사인도 변기를 제작한 회사의 이름이긴 하지만.. 그다음은..깨끗한 변기가 아늑한 미술관의 한구석에 받침대위에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으니 칙칙한 화장실의 때묻은 변기보다는 좀 아름다워 보이기는 한다...뭐 아무리 봐줄래야 이정도?? 이정도 가지고는 이작품이 가져온 파장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것 같다. 그럼뭘까.도대체.
아방가르드.다다이즘의 반(反) 미학
1차대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된다. 고전적 의미의 '예술'이 말하는 '아름다운 가상'은 더이상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인다. 현실은 이제 추하다. 이제 낡은 예술로는 아무것도 말할수 없다. 예술가들은 이태까지 숭배되어 왔던 전통을 공격하기 시작한다.그리고 하나하나씩 파괴한다.
파울클레는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을 거부했고 말레비치는 더 나아가 <검은 사각형>에서 형태와 색채를 해체하는 그림의 끝판왕을 선보였으며, 폰타나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캔버스위에 수직으로 그어진 칼자국 하나만 남겼다. 뭐가 더 나올까? 하던 찰나에 뒤샹이 등장한다. 바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의 역할을 맡았던 액자마저 사라지게 한 뒤샹의 변기이다. '레디메이드(이미만들어진)'라는 이름을 달고..
다다이스트들은 부르주아들만이 향유하는 엘리트문화였던 예술을 무너뜨리려 했다. 부르주아의 취향을 액자 밖으로 꺼내놓음으로써 예술의 평등화, 민주화를 주장했다. 우리가 현대미술에서 흔히 보는 일상 사물과 오브제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모두 다다이스트들의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예술품이 되는 조건
"뭐야 저건 나도 할수 있겠다"
보통 그 위대한 뒤샹의 변기를 보고 사람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길거리 지나가다 변기파는 공장에 들려서 사인만하고 미술관에 제출하면 끝! 이니까..그러나 결코 만만하지 않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을 할 수도 있다" 라는 뒤샹의 말처럼 바로 당신이 아무리 비싼 변기..혹은 다른것들을 선택한다고 해도, 출품한다 해도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서 단토에 따르면 일상사물들이 값비싼 예술품으로 변신할수 있는 '조건'이란게 있기 때문에..
첫째, 해석의 대상으로써의 가치. 뒤샹이 변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것은 그 물리적 속성의 아름다움이 결코 아니라 일상 사물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작품과 함께 동시에 들고 나오는 그 이론. 그것이다..왜 그렇지 않는가 난해한 요즘 현대미술.. 카탈로그의 수많은 해석없이 볼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당신이 또다른 사물을 가지고 미술관을 방문했을때는 이미 뒷북이다. 뒤샹이 이미 그 '개념'을 전시했기 때문에..
둘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사. 위대한 예술가는 미술사를 정리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첫째에서 나온 자기작품의 '이론'을 미술사의 전통의 해석사 속에 아주 적절히 배치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셋째, 예술계의 인정. 그렇다. 작품의 외부적 속성이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 아무리 뒤샹이 변기와 함께 수많은 이론을 가지고 나온다 하더라도 미술관과 예술계에서 인정안해주면 끝이다. 그냥 쓰레기신세로 묻힌다.. 소위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예술계'의 동의를 받아야만 변기에서 예술작품으로 신분상승된다. 뒤샹은 그나마 날리던 작가였기에 이런짓도 예술계에서 받아줬지..만약 나 혹은 당신이 한다면 안쫒겨나면 다행이다..-_-;; 해도 되는 사람과 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냉정하지만...미술계의 현실...ㅠㅠ
반미학의 실패
이제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은 예술사안에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2006년 1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중인 뒤샹의 <샘>이 행위예술가 페이르 파논첼리가 휘두른 망치에 흠집을 얻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범인은 <샘>을 공격한건 행위예술이었고 뒤샹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감사했을걸이라고 호탕하게 말했단다.. 사실 이 행위예술가가 망치로 공격한 <샘>도 뒤샹이 처음 내놓았던 그것이 아니란다. 원래의 변기는 전시후 유실되어 50년대에 다시 똑같이 제작된 변기다. 엄밀히 말해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가짜 레디메이드(fake readymade)란 얘기.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배격하고 다다이스트들은 일상사물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릴려고 했지만 보리스 그로이스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반미학을 추구했던 그들의 예술의 모토는 '새로움의 추구'였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낡은것 없이 새로움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의 예술목표는 일단 논리적으로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또하나, 일상사물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뒤샹은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음으로 모든것들이 예술이 될수있다는 예술의 평등화를 주장했지만 이제 박물관의 그 변기는 더이상 우리주변에서 다뤄지는 변기와는 다르다. '바로 그 변기'가 되어버렸다. 그 변기가 우리주변에서 흔히볼수있는 사물과 다를게 없다면 그 변기에다 오줌을 눈다고 해도, 설령 위에 본 바와 같이 행위예술가가 좀 망치로 흠집을 냈다고 해도 체포될 이유까지는 없는 것이다. 왜냐고? 그냥 변기 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 변기는 강력한 아우라를 띠게 된다. 아마 몰라도 팔면 몇십 억에 팔릴듯싶다.
또한 예술작품의 경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일상 사물들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됨으로써 반대쪽 다른편에서는 기존의 예술가치로 자리매김했던 것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간다. 예를들어 오늘날, 고전적 이상미로 그려진 자연풍경은 더이상 가치를 얻기 힘들며, 길바닥 키치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상적인 영역과 미적인 영역사이의 서로의 자리바꿈일뿐 절대 그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는다. 어떤경우에도 현실 자체가 예술이 될수 없고, 예술 자체가 현실이 될수 없다. 뒤샹의 의도는 완벽히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