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몰랐던, 동사의 맛


글을 잘 써보겠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어휘력이다. 쓰면 쓸수록 어휘력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지닌 낱말 그릇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처음 느꼈을 때는, 읽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다 점점, 적절하면서도 풍부한 어휘로 쓴 글이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됐다. 글을 읽을 때 뜻을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앞뒤 문맥으로 적당히 파악하고 지나치는 습관도 조금씩 고쳤다. 

자연스레 사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사전으로 하나씩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다 보니, 그동안 내가 뜻을 명확히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또 한 단어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도 많았다. 최근 나는 글을 읽다가 이러한 단어들을 검색했다. 속절없다, 지켜보다, 흘러가다, 건네주다, 쫓다, 좇다, 아짐찮다, 아퀴. 이들 단어 중 ‘아짐찮다’와 ‘아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짐찮다 (형용사)   1.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2.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아퀴 (명사)   1. 일을 마무르는 끝매듭.  2. 일이나 정황 따위가 빈틈없이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 앱으로 찾아 정리한 내용이다. 혹시 몰라 위 단어들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찾아봤다. ‘아퀴’는 위와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짐찮다’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지 단어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사전 앱으로 ‘아짐찮다’를 찾아봤는데 ‘‘안심찮다’의 방언’이라는 게 아닌가. 다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안심찮다’를 찾아보았다. 


안심찮다 (형용사)   1. 남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  2. 안심이 되지 아니하고 걱정스럽다.   


네이버 사전 앱에서 다시 ‘아짐찮다’를 찾아보니, 오픈사전에 한 이용자가 작성한 뜻풀이였다. 어찌됐든 ‘아짐찮다’가 ‘안심찮다’의 방언인데, 내가 파악한 바대로라면 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쯤 되니 마음이 복잡하다. 모국어로 글을 좀 써보겠다는데, 복잡한 게 왜 이리 많은지. 어쨌든 즐겁게 글을 쓰기로 한 마당에 더는 주춤하기도 싫어 좀 더 적극적으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해 보기로 했고 그 와중에 전문 교정자 김정선이 쓴 책 <동사의 맛>(도서출판 유유)을 만났다. 우리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를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우리말에서 형용사와 함께 이른바 용언에 해당하는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 제 몸을 풀어 헤쳐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내기 때문이다. 육수나 양념과 마찬가지로 잘 쓰면 감칠맛까지 낼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맛은커녕 허기를 채우기도 어려워진다. 육수에 견준 김에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다양한 육수와 양념이 화학조미료에 밀려나듯이 한자어에 ‘-하다’나 ‘-되다’를 붙여 쓰거나 대표되는 동사 하나로 한통쳐 쓰면서 멀쩡한 우리말 동사들이 때 이르게 죽은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르치다’를 써도 될 때에도 굳이 ‘실패하다’를 쓰고, ‘견주다’, ‘비기다’보다 ‘비교하다’, ‘비하다’를 더 자주 쓰고, ‘가시다’, ‘부시다’를 ‘씻다’로 한통치는 식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말 관련 책에서도, 음식으로 치면 주재료에 해당하는 명사에 밀려 동사는 늘 찬밥 신세다. 그러다보니 제 몸을 풀어 헤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동사는 활용형이 다양한데도 마땅히 찾아 확인할 곳도 없다. 어떤 건 도대체 기본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사전에마저 한두 가지 활용형 말고는 달리 밝혀 둔 게 없다. 문제는 이런 건 누구한테 묻기도 뭣하다는 것이다. ‘밥이 눌기 전에 불을 꺼라’라거나 ‘언젠가 크게 데일 날이 올 거야’, ‘목메여 울다’, ‘체중이 분 뒤로 울해졌다’, ‘바쁘면 얼굴만 비추고 가’, ‘설레이는 마음’, ‘에둘러 가다’, ‘우울할 땐 볕을 쬐여라’, ‘일에 치어 산다’라고 쓰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누구한테 묻고 어디에서 확인한단 말인가(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10p)


머리말을 짧게 인용하고 싶었는데 너무나 주옥같은 말이라 좀 더 길게 인용했다. 김정선 교정자는 “오랜 시간 교정지와 씨름하면서 우리말 동사만 다루고도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사의 맛>을 썼다. 

책은 1,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 2부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다. 말 그대로 1부에서는 가려 쓰면 글맛 나는 동사를, 2부에서는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를 다양한 예와 한 남자와 여자의 사연으로 풀었다. 아하 그렇구나, 하며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인용해 본다.    


나누다 / 노느다
‘나누다’는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거나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해 분류하거나 말이나 의견을 주고받거나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쓴다. 반면 ‘노느다’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눌 때만 쓴다. ‘나누다’는 ‘나누어(눠), 나누니, 나누는, 나눈, 나눌, 나누었(눴)다’로 ‘노느다’는 ‘노나, 노느니, 노느는, 노는, 노늘, 노났다’로 쓴다. (69p)   


뻗대다 / 삐대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건 뻗대는 것이고, 눌어붙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삐대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대학 때 학생 운동 조직에 몸담았던 친구가 한동안 내 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이렇게 늘 삐대서 어쩌냐.” 하고 친구는 미안해했지만 정작 내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이 청와대 근처에 있었던 데다 그때는 동네 곳곳에 의경 초소가 서 있었던지라 밤마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번은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 봤더니 친구 녀석이 불심검문에 걸려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외려 친구는 동네 주민을 상대로 집 앞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뻗대는 것이었다. (137p)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리말을 가벼이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태어나 배운 말이니 굳이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지 부끄러웠다.

책은 지난해 말부터 읽었다. 원래 여러 권의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지만 <동사의 맛>은 유난히 오래 붙들고 있었다. 책이 다루는 동사 중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어 읽는 속도가 더뎠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 책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행히도 책 앞부분에 색인이 있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몇 번이고 책장을 들춰 보기 좋다.

말이나 글이 한 사람을 이루는 큰 부분인지, 이제 내 옆에 없는 사람들의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더 깊이 새겨진다. 앞서 ‘나누다/노느다’ 부분을 인용했다. ‘노느다’란 말을 처음 들은 줄 알았는데, 활용형을 보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노느다’는 어렸을 적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나 먹어.”란 말을 자주 하셨다. 용돈을 쥐여 주시며 과자 사서 친구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장떡이나 전 같은 걸 내주시며 동생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하셨다.

“하나콤 노나 먹어.” 하는 할머니의 얇고 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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