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진 것은 엊그제도, 어제도 딱 이 시간대였다. 어제도, 엊그제도 오후 3시 반 경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억지로 열려는 소리까지는 아니고, 슬쩍 문고리를 돌려보는 소리. 마치 억지로 열려는 생각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열렸나 궁금하니 한번 확인해보겠다는 소리다. 연달아서 이런다는 것은 1) 내가 안에 없다고 확신하거나, 2) 있을 수도 있지만 알아도 상관이 없다, 내지는 알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엊그제는 내가 잘못 들었으리라고 애써 넘겼었고, 어제는 내심 귀기울이다가 이 소리를 명확하게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용의자의 얼굴이 뇌를 스쳐 지나갔다.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은 없기에,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가 떠올랐다는 편이 정확하겠지만.
아랫집에 사는 어딘가 어둡고 조용한 사람인데,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집에 있다고 들었다. 나이는 확실히 가늠할 수 없지만 마흔은 안 된 것 같았고 갓난아이를 업고 다니는, 다른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여자가 아마도 부인인 것 같았다. 그 집의 주인은 그 부모 되는 사람들이었고 다 같이 함께 살고 있었다. 사흘 연속 내 현관문을 건드리는 인간이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은 별다른 근거 없이 걱정을 덜해주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게다가, 그 인간인지 아닌지 물증은 없지 않는가. 앱을 열어서 주민들이 소통하는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당장 글을 남기기로 한다. 뭔가 괜한 의협심인지 집값 방어인지 몰라도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막 나서주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내 집에만 그러리라고 거의 100% 확신하지만, 이렇게 문을 열려고 노력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써둔다.
그 다음날은 일부러 현관 앞에서 귀를 기울였는데, 오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주민의 짓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들어와서 이러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설마 멀쩡하게 인사 잘 하던 3층 아저씨는 아니겠지.
잠깐, 외부인? 외부에서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 중 약간 쎄한 경우가 있기는 있다. 최근에 바뀐 택배 기사 아저씨인데, 자주 조금씩 시키는 물건 때문에 매일 같이 택배를 가져다 주면서도 매번 전화하고, 문은 열어줄 때까지 거듭 눌러서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해야 되나 고민하던 터이다. 가끔 받는 중요한 물건이면 몰라도, 언제 택배가 올지 대충 알고 있으니 그냥 전화할 것도 없고, 문 앞에 제 때 내려놓고 가면 좋겠는데...어떻게 보면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괜히 그러는 것은 아닐까 약간 신경이 쓰여서 대뜸 얘길 못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두니 택배 차가 도착하는 소리도 들리는데, 내리자마자 내게 전화를 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이 문제였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다른 집 택배도 있으면서 굳이 전화는 나한테만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미세하게 신경쓰인 것은 다른 집 앞에 물건을 내려놓는 동시에 벨을 눌려놓고, 바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이다. 나한테도 좀 그러란 말이야, 굳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평소에는 저녁에 오지만, 주말과 월요일에는 대낮에 올 때도 있다. 나는 대낮에는 비교적 별 생각 없이 문을 여는 편인데, 대신 물건은 그냥 밖에 내려놓아 달라고 말한다. 내가 결벽증이 있는 건지, 밖에서 온 물건을 바로 집 안에 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에서 박스 다 처리하고 물건만 빼 오거나, 적어도 물티슈로 한번 닦고 들여온다. 이 택배 기사도 그걸 아니까 생수 같이 무거운 건 집 밖에 내려놓는데, 문을 열어주면 꼭 갖고 들어와줄까 물어본다. 물론 매번 괜찮다고 답한다.
본격적으로 쎄했던 것은 작은 패키지가 도착한 어느 날부터였다. 그 날 나는 벨 소리를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당연히 갔겠거니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가지 않고 있었다.
작은 택배가 있으면 생수 위에 그냥 올려두면 될 걸, 굳이 빼꼼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으로 건네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받았는데, 가자마자 확인을 해보니 하필 물품명을 그대로 써둔 속옷이었다. 이런 건 보통 다른 이름으로 바꿔서 보내주지 않나. 짜증이 치밀었다.
앱에 글을 올린 후 다음날부터 문고리를 건드는 행위는 멈췄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 분개해 해주는 다른 아저씨들의 댓글들 덕분일까.
차분히 생각해 보니 아랫집 그 남자가 분명했다. 바로 전날 그러니까 세 번째로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문가에서 귀를 기울였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면, 몇층에 서는지 직접 보려고 생각했다.
문제의 철컥 소리 이후의 침묵 몇 초, 그리고 약간의 발소리.엘리베이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어 쿵 하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아래층일 확률이 아주 높은 소리.
잠깐, 문 여는 소리가 없었다. 보통 도어락 때문에 띠리링 하기 마련인데. 아니, 반드시 그런다. 외출할 때 아래에서
가끔 들려오는 그 집 도어락 소리에 꽤나 익숙해졌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인물은 지금껏 자기네 집 문을 잠그지 않고 나왔다가 내 문을 건드린 후, 나름대로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신의 집으로 휙 들어간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내 집 문을 건드리지 않는다. 네 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다소 가뿐해진 마음으로 잠깐 산책 겸 장보러 나가기로 했다.
해질녘에 귀가하는데, 집 앞에서 나를 잘 따르는 길고양이와 마주쳤다. 집에 올라가 손을 씻고, 먹을 것을 가지고 내려 왔다. 그런데 마침 택배 차가 건물 앞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
차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각도였다. 오늘은 집에 없는 척 할 필요 없겠군. 실제로 없으니까. 나는 황급히 폰을 진동으로 조정했다. 미세한 진동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는 누군가 인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이유 모르게 안도했다.
한참이 지났다. 이 고양이는 캔을 천천히 먹는 아이다. 재롱도 보고, 결국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지기도 했다.
고양이는 그제서야 집으로 가는 내 발길을 따라왔다.
그 모습을 쳐다보느라 아무런 생각이 없을 그 때였다. 아직 택배 차가 가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집 앞 길가에서 누군가 건넨 인사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당시에 가로등이 하나 고장나서 약간 어두운 갓길 구석이 있었는데, 하필 거기에 주차한 어느 차 안에서 대뜸 '안녕하세요'란 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술 더 뜨는소리.
"키우시는 고양이가 얘인가요?"
설마 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기다린 건 아니겠지.
사실 일부러 의심 하고 싶진 않았지만, 담배를 피운 기색도 전혀 없었기에 길가에 계속 차를 대놓은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랜 티를 최대한 억누른다.
"아, 아뇨."
잠깐. 내가 고양이 키우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물론 누군가의 택배 내용을 알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음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기분은 좋지 않다.
"그런데 누가 또 집에 있어요? 다른 목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소리지. 아, 마침 집에 가끔 들리는 친척이 와서 쉬고 있기로 한 날이다. 아마도 그녀가 택배 기사의 인터폰을 받았을 것이다. 대뜸 문을 열 사람이 아니니 아마도 내가 집에 없다고 목소리만 냈겠지. 아니, 그럼 그런거지, 대체 뭐가 궁금한 걸까.
다른 사람도 집에 함께 산다는 인상을 주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강 답하는 둥 마는 둥, 고양이가 제 갈 길을 가자마자 집으로 올라갔다. 문앞에서 짙은 담배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아랫집 용의자가 복도로 나와 담배를 피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내 문고리도 건드렸겠지. 조금 전의 일과 겹쳐 상당한 피로감이 된다.
안 쓰는 방에서 쉬고 있을 친척을 굳이 불러내기 싫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고양이들은 다 자는 모양이다. 최소한의 등만 켜고, 피씨 앞에 앉는다.
내게는 카톡 알림을 다 꺼두고 피씨에서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평소에 확인하기 귀찮아서다. 내가 볼 준비가 되었을 때 몰아서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특히나 키보드로 카톡을 할 필요가 있다. 두 달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 K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요즘 자꾸 무더기로 메시지를 남겨 두기 때문이다. 추억 공유에다가 넋두리에, 사과에 반 협박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읽고 침묵을 지키는 것 뿐이다. 읽지 않으면 폰은 물론이고 집 전화까지 울려대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더 철저히 무음 모드로 해 두는 이유.
K가 이렇게까지 할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내게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것을 의심한 끝에 과잉 반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K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두어 달 전에 거래처로 알게 된 P와 사귀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아, 그럼 K의 추측이 맞은 셈인가. 모르겠다. 그 어느 것도 내가 계획적으로 한 것은 없다. 오늘은 정말로 K에게 미안하다고, 그만해 달라고, 우린 정말 끝났다고 몇 마디 남겨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웹 카톡을 켜는 순간 K의 새로운 메시지는 없다는 의외의 사실에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P의 말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P와 나는 생각보다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는 퇴근하고 쉬던 중인지 메시지를 바로 바로 날렸고, 적당한 장난과 진지함이 섞인 대화는 상당히 즐거웠다. 갑자기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카톡 알림이 귀에 들어온다. 까똑, 까똑. 대화가 빨라질수록 소리의 간격도 좁아지고 있다. 이 정도면 바로 눈앞에 P가 앉아 대화하는 수준으로 빠르다. 어쩌면 알림 소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연애 초기의 감정은 소리 공해도 귀엽게 들리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잠깐. 알림 소리라니?...
끼이익.
친척이 쉬고 있던, 아니 쉬고 있어야 했을 방문이 스르륵 열린다. 카톡 알림 소리가 미세하게 커진다. 낯설게 느껴지는 폰을 쥔 손, 거기서 들려오는 내용 모를 알림 소리.
고양이들은 일찍이 숨어 들었던 것이다. 친척도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마치 그간 내내 무음으로 진행되었던 P와 나의 대화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후기
집에 들어온 후의 일은 픽션이고, 나머지는 다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특별히 위험한 곳에 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한국은 어지간한 다른 나라에 비해 안전하다. 적어도 내가 보통 하는 활동 중에서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작정한 또라이는 어디에나 있다. 한 번은 내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어떤 인간에게, 과일 깎는 칼로 팔을 찔린 적이 있다.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나를 어디로 끌고 가거나 더 잡아 두지를 못했다. 그놈이 나보다 더 당황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렇게 찔리고 끝내서 다행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중에 그 인간은 애초에 왜 나를 놓아주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가버릴까봐 두려웠다"라고 자백했다. 그야말로 소수의 작정한 또라이에 속한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답변이다. 심지어 나는 그 인간과 멀쩡한 일 관계로 만났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만나기 전부터 그놈은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특별히 "잡아두려고"가 아닌 "가버릴까봐"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이다.
그 후로 문 단속은 물론이고, 누가 됐던 간에 타인과 닫힌 공간에 홀로 있지 않는 것이 철칙이 되었다. 아, 그리고 나에 대해 감정을 가진 사람과 원수 관계가 되지 않기.
앞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나 환경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소수의 작정한 또라이는 조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