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자격과 소문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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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 자격이란 있는가? 우선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만을 소설가로 보는건 너무 편협하고 보수적인 시각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셜록 홈즈와 같은 소설들은 신춘문예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들이 유명해지고 영상화까지 되어도 문학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성공하고도 이토록 박한 평가를 받는데, 신인이었다면?

수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예술가들은 사후에 비로소야 인정 받는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전업이냐, 취미냐로 나눌 수 있는가? 취미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취미일 뿐 소설가로 부르기에는 부족할까? 전업 소설가의 삶이라는게 보통은 아주 어려운 길이다. 취미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 어려운 길을 포기한 사람일까? 그 어려움을 겪어야만 소설가라면, 화려하게 등단하여 처음부터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은 소설가는 소설가가 아닌게 된다. 그래서 전업이냐, 취미냐도 자격을 판별할 척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써낸 소설의 수는 어떤가? 작품에 따라 분량이 다르다고 하면 글자수는 어떤가. 이는 따져볼 여지도 없다. 분량이 같다고 같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며, 작가가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대중에게 내비치지도 않는다. 내비친다 하여도 바뀌는 것은 없고. 출품 주기 또한 유용한 정보는 될 수 없다. 출품과 출품 사이를 오롯이 집필로 보내진 않으니.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 더 중요하다. 학창 시절에 과제로 시를 한편 써낸 적 있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시인이며 소설가가 된다.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하실 독자분도 계실 것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소설가에 부여된 권위를 깎아내고 있으며, 소설가라는 호칭을 더 많은 작가들에게 돌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호칭은 구분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누가 명확한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소설가의 자격이란 굉장히 모호하다. 그렇다면 모호한 소설가의 자격 대신 소설의 자격을 살펴보자. 소설은 무엇인가? 무엇이 글에 소설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가? 이것 또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은 그래. 구분해서 뭘 하겠는가?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많은 직업을 가지는데. 소설가도 언젠가는 호칭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논리를 따지자면 이렇겠지만, 내 주관은 다르다. 남을 향한 내 주관이 아니라 나를 향한 내 주관을 품는건 내 자유이니 억지로 바꿀 필요도 없고, 바뀌기가 쉽지도 않다. 그 주관이란 무엇이냐 하면, 나는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읽고 나면 내 글을 소설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진다. 소설 대신 내 글과 소문의 벽을 구분할 적당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마 독자분들은 내 프라이드를 아실 것이다. 나는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게 열등감이나 자격지심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리 프라이드가 없다고 해도, 대가의 작품을 읽은 것으로 좌절할 정도라면 어떻게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왜 이청준이며, 왜 소문의 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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