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세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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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Elicia Edijanto)


  겨울밤 잠옷 위에 코트만 입고 길 건너 빨간우체통까지 달렸던 기억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누군가 말해줘서 초록색 펜으로 써내려간 편지를 주머니 깊숙히 넣고 뛰었다. 봉투를 봉했던 물풀이 마르지 않아 오돌토돌한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면서 그 아이 생각을 했다. 편지를 받을 그 아이는 겨울내내 고동색 스웨터를 입고 등교했다. 그 시절 그 아이에게 코트가 없었다는걸 나는 지금 막 알아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있는 마음은 설레는데, 삼십년 후엔 울고 싶어질 것이다.

  주고받은 편지는 감정의 교류가 실재했음을 증명하기위해 양철박스 안에 쌓여있다. 마지막으로 찍힌 소인날짜는 알아볼 수 없다. 다시 만난다면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네가 보고싶었다. 이 도시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면 한 번쯤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저녁이었다. 교보문고 인문학 코너에서 그 아이와 꼭 닮은 사람을 보았다. 볼살이 약간 없어졌지만 두 눈의 온기와 단정한 입술은 그대로였다. 잠시 망설였다. 다가가서 뭐라고 말해야할까. '저기요, 혹시 모학교를 졸업한 아무개씨가 맞나요?' 속으로 몇 번 연습하는 동안 그 아이는 역사코너로 뒷편으로 이동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고 그 시절 그 아이와 함께 보았던 영화까지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그 아이를 시야에서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서점 안을 뒤졌다. '아... 이 부끄러움은 나이를 먹지 않는구나! 설사 그 아이가 아니더라도 실례했다고 사과를 하면 될텐데. 그 아이가 맞다면 잘 내린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일이 있고나서 조금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부끄러움보다는 용기를 조금 더 앞세우기로 했다. 먼저 말을 건네고 먼저 안부를 묻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면 후회가 남지 않았다. 오늘도 엘리베이터에서 눈이 마주친 어린 꼬마에게 먼저 미소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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