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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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주관에서 나온다. 정확히는, 본질에 대한 논의는 주관에서 시작된다.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 자신이 없다면, 본질에 대해 통찰하는 나도 없고, 타인의 통찰을 이해하는 나도 없다. 따라서 내가 없이는 본질도 없다. "내가 무엇인가?"는 본질에 대한 탐구에 앞서 필연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의문인 것이다.

유명한 격언, "너 자신을 알라"는 어떤가? 자신의 본질에 대해 모르는 이가, 어떻게 타인의 본질을 뚫어볼 수 있겠는가. 자신을 모르는 이의 지식이란, 단순히 세상의 표면을 훑어낸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는 "시심마(是甚麼)"가 있다. "이뭣고"라고도 하는데 본질에 대한 끊임 없는 질문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화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행되는 질문은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나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공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남겼다.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거창한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리타분한 옛말로 보일 수 있으나, 이상적인 천하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상적인 나라에 대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과거에는 객관성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공감에 대한 견해도 달랐다. 정신병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타인을 해치는 사람을 "객관성"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의지로 이겨냈을거라는 의지에 대한 유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병에 있어서도 가족력이 중요하다. 태생적으로 유달리 취약한 사람이 있으며, 그 사람들은 작은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정신이 무너진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당신의 정신도 무너졌을 것이다. 진정 "그 사람이 된다"는 것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그 사람의 위치에 놓일 뿐인게 아니다. 그 사람의 유전자를 갖고 그 사람이 살며 쌓아온 자아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의학, 심리학 등에 대한 이해 없이는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 타인의 주관을 이해할 수 있어야, 객관 또한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 본질에 대한 탐구라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는게 시발점이다. 이 질문에 흐릿하게라도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너는 누구인가."에도 흐릿한 답이나마 내놓을 수 있다. 나와 네가 누구인가에 답할 수 없는 사람이, 나와 네가 맺어야 할 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야하는지에 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누군지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정신의학을, 심리학을 알아야 한다. 사회학을 알아야 한다. 뇌과학을 알아야 한다. 본질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서는 모든 사실에 통달해야 한다. 인간의 학문이란, 결국 인간이기에 갖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한 탐구이다. 실용성에서 멀다고 여겨지는 학문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학문에는 인간이 무엇인가가 담겨있고, 그 모든 학문에 통달하여야 인간에 대한 육하원칙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라면, 철학이 필요 없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면 "나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나라가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도, 철학자들의 이름을 알지도, 학문적인 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철학자가 아니라면 철학자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당신 또한 철학자이며, 철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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