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소수들을 위한 살롱의 시대


무형의 가치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물건보다 더 귀한 것이 되어가는 시점에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무얼할까.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방 안에서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데, 모임의 공동체와 그 공간은 갈수록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공통적 특성에 따라 모이고 사귀어왔는데, 이제와서 더 중요할 이유는 무엇이고 달라진 것은 무얼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는 사회가 정해놓은 학교나 회사같은 시스템이 아니다. 개인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정해진 프레임을 맞추는 것이 아닌, 철저히 자율적이고 주최적인 모임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과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달라진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은 배움이나 먹고 사는 것에 대한 태도와 선택까지 바꿔놓고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터 공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큰 화두가 되었다.


물건을 사는 상점도 작품을 보는 미술관도 커피를 마시는 카페도 공간의 중요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험은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며 주관적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실체화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시각적인 요소이다.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컨셉, 익숙한 듯 새로운 공간 디자인, SNS에 업로드할 수 있는 포토존들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적 요소나 아름다운 음악, 기분 좋은 향 등 복합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 더해진다. 모든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경험의 과정을 조화롭게 만들어낸다면, 그 공간의 경험은 꽤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경험이 그 순간의 것으로 끝난다면 다음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지속가능한 공간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컨셉과 구별되는 '주제'는 비슷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이렇게 묶고 저렇게 묶는다. 그 안에 취미와 취향,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까지 다양한 삶의 개별적 장르가 들어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지에 관한 것이 공간의 주제가 되면, 공간은 더 이상 물리적인 개념이 아닌 모임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처음 마을을 이루고 사회를 꾸려갔던 아주 먼 과거의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탐구할 수록 어떤 편견과 선입관도 없이 시작했던 맨 처음과 맞닿을 수 밖에 없다.

주제가 있는 공간과 모임은 시간과 멤버가 정해진 동호회가 아니다. 숫자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꼭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할 필요도 없다. 일대일이어도 상관없다. 각자의 리듬이 있고, 함께 공유하는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지만 적절한 무게감을 가진 모임이 된다.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들이 군집을 이루게 되면서 '불특정 소수들을 위한 살롱'이 만들어지고 있다.

살롱은 18세기 프랑스의 귀족들이 자신의 집에 문인들을 초대하여 작품을 낭독하고 그에 대해 토론과 비평을 나누던 사교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면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이들이 이 사적인 살롱에 드나들었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공연을 즐기는 형태로 까지 이어졌다. 1920년대 파리에서는 헤밍웨이나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카페에서 만나 난상토론을 벌이며 서로에게서 영감을 주고 받았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 무작위로 뒤엉켜 예술과 문화를 증폭시켰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세계관을 지키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많은 문학가들이 다방이나 서점을 살롱으로 삼아 교류하고 소통했다. 시인 이상은 1930년대 초 종로1가에서 '제비다방'을 비롯한 여러 다방을 운영했고, 시인 박인환이 1945년 종로3가에 차린 서점 '마리서사'는 미술, 문학, 영화계 사람들에게 사랑방같은 공간으로 자리했었다.


현대판 살롱은 어떤 모습일까.


가까운 과거에는 경험치를 채우고 영감을 얻는 것에 있어서도 마치 학습하는 듯 했다. 유명인의 강연과 그들이 알려주는 방정식을 궁금해하며, 글로벌 기업의 성공사례를 어떻게 우리도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살롱이라기 보다는 세미나에 가까웠고, 그게 아니면 엘리트들을 위한 살롱이 존재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모두가 예술가인 시대가 되면서 새로운 모습의 살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제의 소규모 워크샵이 열리고 독립된 형태의 실험적인 전시들이 이곳저곳에서 선보이게 되면서 기존의 카테고리로 설명될 수 없는 주제가 있는 공간과 프로젝트, 브랜드들로 확장되었다. 현대판 살롱을 열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시장을 열고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젊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창의적 욕구를 채워주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안한다.

누구든 각자의 분야에서 공감을 위한 클래스를 열 수 있고, 어떨 땐 선생님이 되었다가 어떨 땐 학생이 되기도 한다. 고정적인 멘토와 멘티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적 성공이 자격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와 취향이 각기 다르게 존재할 뿐, 누구도 절대적인 우위에서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지금 형태의 살롱이다. 멤버쉽 따윈 없지만, 다수가 아닌 한 명 한 명이 독립체로써 '소수들'이 되어 불특정하게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모인다. 어떤 형태로 모여 무엇을 하든 정하기 나름이다. 무겁고 진지한 토론부터 가벼운 흥미거리와 취미에 대한 것 까지 세상사의 모든 것이 주제가 되고 재료가 될 수 있다.

개별적인 모임 하나하나가 쌓여가면서 일관된 방향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서로 다른 만남으로 인한 의외성과 시너지가 더해져 커뮤니티를 형성해나가는 길목에 우리는 지금 서있다. 규모의 경제가 아닌, 보통의 존재들에서 시작되는 이 문화는 적어도 젠트리피케이션의 그늘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다양한 주제와 실험적인 시도들로 풍성해지는 '불특정소수들을 위한 살롱'의 시대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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