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이 많은 날은 적어도 한두 시간 꼼꼼히 손을 풀어준다.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여야 할 때가 있는데, 연습 안 한 곡을 손까지 굳은 상태에서 치려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은 레슨 하나가 미뤄져 비교적 여유롭게 아침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연습의 가장 어려운 점은 '피아노 앞에 앉기'고, 그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손 풀기'다.
손 풀기는 나만의 루틴이 있는데, 3년 전 무턱대고 연습하다 손을 크게 망친 이후로는 특히 더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가끔 시간에 쫓길 때는 그날 연습을 포기하고 손만 푸는 경우도 있다) 연습 시간에 맞게 15분, 30분, 1시간 코스로 진행되는 이 과정은 손을 풀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명상의 과정이기도 하다.
처음 피아노 앞에 앉으면 메트로놈 15의 박자에 맞춰 한 음씩 몸의 무게를 실어 치는 연습을 15분 정도 한다. 이 과정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 느린 박자에 맞추려면 모든 상념을 버리고, 오로지 박자와 손끝의 타건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상하게 마음이 붕 떠 있었고, 그래서 박자를 맞추기도, 손끝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계획된 오늘 연습 과정이 있었지만, 갑자기 늘어난 연습 시간 때문인지 집중이 잘 안 됐고, 그래서 오랜만에 아이패드를 꺼내 예전에 쳤던 악보들, 내가 좋아하는 스탠다드 곡들을 두서없이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그날 연습은 망한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연습하던 곡을 발견하게 됐다. 무척 빠른 곡이었는데, 연습 당시 원곡 속도로 치려다 결국 포기했던 곡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쳐봤는데, 예전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손이 더 빠르고 가볍게 움직였다. 며칠만 연습하면 작년에 목표로 잡았던 템포에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곡은 잘못된 손가락 번호 때문에 연습 당시 고생을 많이 했다. 속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확한 손가락 번호인데, 가장 중요한 작업을 꼼꼼히 하지 않았다. 운지가 정확하지 않으면 절대 빠른 템포에 맞출 수 없다. 여섯 마디 내내 빠르게 이어지는 긴 프레이즈 중 딱 한 음. 4번을 3번 손가락으로 바꾸는 별 것 아닌 과정이었다.
습관을 들이는 것 보다, 들인 습관을 없애는 것이 더 어렵다. 시간을 들여 손가락 번호를 교정했지만, 4번으로 연주하던 과정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분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몸이 경직됐고, 팔과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무리해서 속도를 내려면 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손이 망가질 것이 자명했고, 이미 손을 심하게 다쳤던 경험 때문에 두려움이 앞섰다. 아쉽지만 패배감과 함께 그 곡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쳤을 땐 느낌이 달랐다. 오랜기간 치지 않았던 덕분에 '4번 손가락'으로 부터 파생됐던 나쁜 습관과 몸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3번이 제 운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프레이즈에 녹아들었다. 그래서인진 모르겠지만 전혀 몸에 긴장이 없었고, 더욱 빠르고 가볍게 연주할 수 있었다. 또 불필요한 힘은 빠졌지만 손목이 속주를 적당한 힘으로 지탱해주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엔 집요해야겠지만, 가끔은 내려놓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오늘 연습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려놓음이 비로소 완성되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포기'가 되는지, '내려놓음'이 되는지는 그것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늘 연습은 망해버렸지만, 그보다 더 큰 성취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