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모 기독교 재단에서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순교한 선교사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한 적이 있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이 영화는 XXX 선교사 님의 일생을 담은 영화입니다. 부디 경건하게 시청해주십시오'라는 메세지를 내보냈다. 종이 봉투에 향기 나는 카라멜 팝콘을 듬뿍 담아 좌석에 앉은 나는 감히 죄스러워 팝콘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주제는 좀 다르지만, 관객에게 어떤 특정 종류의 감정을 주문하는 영화는 전 정권에서 참 많이 나왔다. '산업화 시대의 역군인 우리들 덕분에 너희가 있으니 기억하고 감사해달라'는 메세지는 오독의 여지 없이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했다.
물론 영화에서 어떤 메세지를 넣는 것은 감독의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이 그 영화를 주변인들에게 즐기고 추천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종교를 다뤘지만 흥행에도 성공한 것은 그 영화가 메세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만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우려
촛불이 모여 정권이 바뀌었고, 전 정권에서 감히 제작이 용납되지 않았던 수많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광주항쟁을 다룬 <택시운전사>가 나왔으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 그리고 서울의 봄을 다룬 <1987>이 나오는 것도 시기적으로 적절하며 또한 환영할 일이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운동권 선배들이 비운동권 계열에게 하나둘 학생회를 뺏기던 그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강제로 독립 영화를 관람하게 하고, 그게 싫어 도망다니는 후배들에게 너희들은 고마워할 줄 모른다던 선배들의 그 일갈이 이 영화에서 비집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 영화의 주 관객층이 1987년이 아니라 밀레니엄 세대 근방에 태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필요한 우려였다. 1987은 매우 재미 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즐길거리가 참 많은 영화였다. 누군가는 감동과 고마움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과거에 대한 자랑스러운 회상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긴장감 있고, 세련되며, 유머러스하면서도 감동적이다. 필름이 담아낸 1980년대의 서울도 아름답다.
영화 초반부를 힘 있게 이끌어내는 캐릭터는 박처장 역할의 김윤석과, 최검사 역할의 하정우이다. 하정우와 김윤석. 벌써 <추격자>와 <황해>, 그리고 이번 1영화까지 세 번째 호흡을 맞췄다.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거리다. 두 남자의 거친 카리스마가 영화 초반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이북 사투리와 냉혹한 행동으로 사람을 공포에질리게 하고, 애국이라는 신념을 강요하는 김윤석에 반해, 하정우는 능글능글하다. 권위주의가 횡행하던, 직함이 그 사람의 전부이던 그 시절, 최검사는 스스로를 똥개라고 이죽거리며 박종철 군의 화장 동의서가 아니라, 시신 보존 명령에 서명한다. 요즘 표현대로 하면 '폭풍 간지'다. 이 캐릭터의 실제 모델인 최환 검사는 이 결정으로 인해 인사에서 좌천되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
최환 검사 개인의 사명감 뿐 아니라 당시 검찰과 경찰 간의 알력 다툼을 드러내는 장면도 흥미진진하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 그 악명 높은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검찰은 결국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당시 군사 정권은 일선에서 발로 뛰며 반독재민주화 세력을 때려잡는 경찰을 훨씬 총애했고,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뒤치다꺼리 하는 수준이었다. 검찰 입장에서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자존심을 한 번 세워보고자 벼르고 있던 차에 마침 사건이 터진 것이다.
법 위에 있는 대공 조직과, 경찰 그리고 검찰. 은폐하려는 조직과 드러내려는 조직. 권력의 충돌과 자리의 충돌. 마치 잘 짜여진 미국의 정치 스릴러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긴박감 있고 흥미진진하다.
퍼져 나가는 진실
검찰청 한 구석에서 새어 나온 말을 바탕으로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가 손을 덜덜 떨며 쓴, 단신으로 나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기사. 차 뒤에 몰래 숨겨 둔 수사 기록과, 잡지 <선데이서울>에 숨겨 놓았던 민주화 투사들의 편지. 보도지침을 어겼다고 쑥대밭이 된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신성호 기자를 대피시키는 편집국장(오달수). 이들이 바로 당시 진실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 분투한 개인들이다.
기사로 큰 파문이 일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기자 회견을 열고 여기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불후의 명언이 나온다. 말하는 사람조차도 기가 막혔던 거짓말. 모여있던 기자들은 실소를 내뱉고, 치안 본부장(우현)은 실수로 목격자인 오연상 교수의 이름을 언급한다. 오연상 교수에게 진실을 듣기 위해 꾀를 내어 화장실에 숨어 있던 <동아일보>의 윤상삼 기자. 오연상 교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이 본 진실을 윤상삼 기자에게 말해준다. 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든다.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사건이 어디있는가 싶다. 하지만 그 영화 같은 진실을 짧은 필름에 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훌륭하다.
화면에 담긴 아름다움
무겁게만 흐르던 영화는 이내 대학교 신입생 김태리를 등장시키며 그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어 간다.
대학 입학 시험이 끝나고 츄리닝 바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들 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방에 누워 있다가 삼촌에게 선물 받은 워크맨에 환호하고, 입학 후 첫 미팅을 하루 종일 준비하고, 친구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며 어떻게 하면 캠퍼스에서 더 주목을 받을까 고민하고, 잘 생긴 선배에게 설레는 김태리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귀여운 새내기이다.
김태리가 이한열 군을 분한 강동원과 조우하는 장면은 감독이 시대의 비극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그 유머 감각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로부터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가면을 벗는 장면은 무수히 많았다만 어떻게 그 소재가 경찰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장일 수 있을까. 이런 적이 있었던가? 여기에 자신의 얼굴이 까맣게 그을렸다는 걸 알고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김태리의 행동은 깨알 같은 웃음 거리다.
백골단에게 납치되듯 끌려가 멀찍이 시골에 버려진 김태리를 강동원이 구하러 오는 장면은 십년 전 강동원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영화 <늑대의 유혹>을 연상하게 한다. 어떻게 1987년을 다룬 영화에서 하이틴 로맨스 영화인 <늑대의 유혹>을 오마쥬할 수 있었을까.재밌고, 놀랍다.
그렇다고 영화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아니다. 강동원의 등장은 자연스레 학생 운동에 아무 관심이 없던 예쁜 여대생의 눈을 뜨게 만든다. "시위한다고 세상이 바뀌느냐?" 는 질문에 "나도 아는데, 아파서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 담담히 답하고 몇일 뒤 잘생긴 청년은 죽는다. 실로 보는 사람을 웃게 하다가 울게 만드는 장면이다.
유머 감각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장준환 감독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을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김정남(설경구 분)의 탈출을 표현한 장면이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공안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을 알게 된 김정남은 교회의 옥상으로 피신하지만 체포망은 점점 좁혀온다. 박처원은 십자가 형상의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옥상에 매달려 버둥대는 김정남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이 장면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오우삼 감독의 영화를 오마쥬한 것이다. 1987년의 박처원에<페이스 오프> 속 존 트라볼타를 씌운 감독은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유머 감각이라니!
영화 감상 후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 민주화 운동을 다루는 이 영화에 이런 대담한 유머를 담을 수 있었겠지. 명작 게임에 숨겨둔 이스터 에그를 보는 느낌이었다. 흥행에 실패한 <지구를 지켜라> 이후 상당한 기간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유머 감각으로 당대 여배우인 문소리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엉뚱한 감독이라면 김정남 역할에 설경구를 기용한 것에도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궁금하다. 극 중 수많은 사람들이 김정남 한 명을 살리기 위해 희생당한다. 혼자 살아서 도망가는 김정남의 행동은 도덕적으로는 비난할 소지가 있을지 모르나 또한 큰 틀에서 그는 정국을 뒤엎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설경구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비난 받는 배우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극에 펼쳐지는 주인공의 상상이 아니라, 마지막에 드러나는 경악스런 현실을 관객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기 위해, 단 삼 초 동안 등장하는 요리사 역할에 프랑스의 대배우 제라르 드 빠르디유를 기용했는데 굳이 조연에 불과한 역할을 설경구가 분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세상은 앞으로 간다
김정남이 이부영에게 받은 서신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보내지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그 사실을 미사 중 발표한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이 진실은 6월 항쟁을 낳고 결국 진실은 승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년 전 보았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바로 시청 앞 광장이 태극기 물결로 가득차는 것이다. 광장과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지금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기득권이 되어버린 386세대에 대한, 기억의 환기이자 읍소이다.
영화엔 박처장이 악인이지만 그가 악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과, 그가 믿었던 애국이라는 신념이 무엇인지에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하는 일을 애국으로 믿어왔다가 배신당한 국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고문 경찰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떤 점에서 신념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일본의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는 '돈은 보편적인 가치이지만 신념이란 사람들의 숫자만큼 달리 존재하는 만큼,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나쁜 일'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각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선인가. 영화 <변호인>에서 '무엇이 국가를 위한 애국이냐'고 묻는 곽도원의 질문. 그 질문을 비웃기 전, 자신이 비웃던 그 권의주의자들과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애국'은 물론이고, '평등 실현'이나 '계몽'같은 목적을 가친다고 해도 역시 위험할 수 있다.
신념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만 그 신념을 지키는 과정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는 선배 박종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변절하여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6대, 18대 총선에서 내리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를 듣고 정계를 떠나 지금은 극우 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박처원 치안감은 같이 구속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출소한 후에 고문경찰관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했다. 물론 진심 어린 사죄는 조금도 없었다. 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현재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었고 현재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결국 박종철 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건 말단 경찰관들 몇 명뿐이다. 그 경찰관 다섯마저도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기부터 최고 7년 3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가석방되었다.
현실은 영화보다 치열하고 또 영화보다 훨씬 어려우며, 때로는 비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그때 '분명한 악'을 향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뛰었던 그 순간은 세상이 복잡하고 각자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것과 별도로 형언하기 어려운 가치가 있다.
말 그대로 정반합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대한 담론이 있고, 차이가 있지만 결국 누가 보아도 틀린 것을 걸러내며 조금씩 사회는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 의한 고문이 만연하고, 독재와 검열이 횡행하며, 명백히 잘못된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소중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1987년에 그랬고, 30년 뒤인 바로 작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때가 그러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반합으로서 그래도 사회는 조금씩은 좋아지고 있다는 것 아닐런지.
그때 광장에서 계셨던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유도, 1987 같은 훌륭한 영화도 나오지 않았을테니까요.
- 2017년 12월 31일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