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은 어떤 사람이고 풍류판관은 어떤 사람인가? - 스팀방송국 총수직을 수락하며

누군가 스팀시티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 밖에 없지 않냐는 말을 남겼더군요. 사실 전 그 말을 딱히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아마 그 중에서도 제가 제일 멀리 나가 있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되기에, 딱히 이미지를 고려한 레토릭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글이 현상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부터 쓸 내용이 스팀시티에 관심 있는 분들께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멀린은 어떤 사람인가?



누군가 왜 멀린님은 스팀시티 총수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을 총수로 세우려고 하냐는 질문을 하더군요. 누군가는 재정적인 부담을 껴안기 싫어서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졌고 또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힐난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사람들이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멀린님의 정체성과 구상의 허황됨을 문제 삼는 사람들조차도, 최초 스팀잇 입주 시부터 멀린님이 구사해온 문장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뒤에서 교묘하게 상왕 노릇을 하려는 것은 아닌가, 부담은 껴안고 싶어하지 않는 노회하고 교활한 중년의 남성은 아닐까, 쉽사리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지금껏 멀린님을 직접 만나고 판단한 것은 다소 다릅니다. 굳이 역사 속 인물에 비유하자면,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대동아공영권과 대척점에 있던 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관동군에 배속된 일본인들로 하여금 일본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만주국에 오족협화(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이 협력하여 지상낙원을 이루자는 이상)를 세우자고 말했던 이시하라 간지와 가장 흡사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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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설명하면 원래 만주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이자 괴뢰 정권에 불과했고 그 정체성은 일본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족협화란 처음부터 허황된,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주창했던 일본인들의 진의 역시도 여전히 의심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육군 사관 학교를 2등 졸업(사실 수석 졸업이었습니다만 수석 졸업자는 천황과 독대를 하는데, 그 독특한 성격으로 기행을 벌일 것이 두려워 차석을 주었다고 합니다)해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걸고 항명해 군대에서 퇴출된 그가 어떤 비즈니스적인 감각을 가지고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죠.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시하라 간지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게다가 일본 유명 사이비 종교의 신도이기도 했죠.

여기서 그친다면, 그냥 카진스키(하버드를 졸업한 유명한 테러리스트입니다)처럼 머리는 좋지만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다 정도로 끝났을 텐데, 이시하라 간지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당히 정확히 미래를 예견했다는 겁니다. 여전히 발도술이나 기마술을 가르치는 육군 사관 학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 모함이 주력이 되고 어떻게 비행기를 운용할지를 설파했다거나, 아직 아인슈타인조차도 핵 무기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하던 시점, 정확히 핵 무기와 유사한 형태의 폭탄이 등장할 것을 예측했다거나, 히틀러가 등장하기도 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하는 등 말이죠.

지적 수준은 높지만 전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 선교사가 되기 위해 자기 젊음을 투신하고 스팀잇이 단순한 SNS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어떤 종교가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 점, 도대체 어떻게 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품이든 캐릭터든, 기획자로서 남긴 역량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크고 작건 간에 본질적인 면에서는 이시하라 간지와 멀린님이 매우 흡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만약 멀린님이 비즈니스적인 어떤 가치를 취하는 사람이었다면 멀린님은 여전히 이 스팀잇에서 편하게 보팅을 받고 계실 겁니다. 스팀방송국을 열기 전 여하간 멀린님은 이곳 스팀잇에서 글만으로 가장 많은 보팅을 받으시는 분 중 하나였고, 스팀시티 미니 스트릿의 경우에도 그 많은 잡음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내부 단속을 잘 해서 좋은 이미지를 지켜 나가고 대중 친화적인 모습을 유지했다면, 여하간 선점이라는 그 효과로 적지 않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버그가 있는 OS나 플랫폼이라도 일단 시장에 쭉 깔리면 그것이 답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보았을 때는, 대중과 척을 지고 이미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팀시티는 완전히 삽질을 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멀린님은 스팀시티가 가라앉았다고 자인하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사건은 하늘님과의 다툼이 아닙니다. 라라님과 미니 스트릿 예산을 두고 고민한 내용을 담은 바로 그 글이었죠.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은 이후 스팀파워를 회수하셨습니다. 약간 힐난조로 왜 그런 글을 작성하셔야 했냐고 물었죠. 그때 멀린님은 자신은 직관에 반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거군요. 직관을 따르는 수 밖에 없고, 그 글을 다 완성하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이 새던 스팀시티라는 배는 완전히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멀린님 같은 분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제가 예전에 스스로를 사기꾼이라고 믿는 사람보다, 자신은 주님의 일을 한다, 국가를 위한 헌신을 한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훨씬 위험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문장은 멀린님을 타깃으로 쓴 것은 아닙니다만 본 스팀시티를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 멀린님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아직 어린 중2병 환자도 아니고, 노회한 어른이라면 말이죠.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은 한 발을 쏘고 살아남을 때마다 베팅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러시안 룰렛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비유를 들며 자꾸 추축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히틀러가 폴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한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잘 준비된 독일전차 군단의 쾌진격의 당연한 귀결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동서고금의 전쟁사 전부를 통틀어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기적적인 사례에 해당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최강의 육군 대국으로 군대 규모는 독일의 5배였고 그 전차조차도 더 많았으며 튼튼한 요새에 영국군의 지원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나치 독일은 프랑스는 고사하고 폴란드를 점령하기도 버거운 전력이었지만, 불과 5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했습니다. 이때부터 종전 비교적 상식적이던 독일 군부는 자신들의 숙명이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묘한 광기에 빠지곤 했죠.

하지만 그 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전쟁을 연달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만 적당한 시점에 강화 조약을 맺었겠지요. 하지만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는, 몰락하는 독일 제국을 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뽑았어.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을 지고 있는거야.”

실제 괴벨스는 구차하게 살 생각을 안 하고 일가족과함께 총통을 찬양하며 자살했습니다. 그가 대중선동의 천재였다는 점에서 보듯 이렇게 지적 수준과 합리성은 크게 비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신념을 위해 살았다는 점에서 일관성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렇다고 그가 무책임했다는 사실 자체가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 멀린님은 자신이 총수를 자임하지 않고, 또 처음부터 저보고 총수 자리를 권유했는지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면, 비교적 젊은 게다가 허세끼도 있는 남자여서 뒤에서 컨트롤 하기가 쉽다고 판단했다거나, 또는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좀 더 신뢰를 줄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거나(물론 요즘 변호사는 정말 많고 또 흔한 스펙이긴 합니다), 이런 식의 결론을 내는 것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릅니다.

다만 제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멀린님은 본인의 지적 수준과 관계 없이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진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아더 왕을 만든 마법사 멀린처럼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류판관은 어떤 사람인가?



저는 원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 너는 무엇을 믿냐고 물었을 때, 믿지 않는 것이야 말로 내 믿음이며, 특히 나 자신을 가장 믿지 않는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미래에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멀린님이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가진 직책을 언급하시니, 한 번 역사적으로 최고의 지고한 권력을 가졌던 한 인물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관철시킬 수 있던 힘의 크기가 가장 컸던 사람은 유명한 황제들이 아니라 바로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이었습니다.

한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대를 다니고 무수히 성경책을 읽었던 그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따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불후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믿는 것을 보지만 현명한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다.“

아마 스탈린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학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어려서 자신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지녔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종교입니다. 물론 믿기에 편리한 방법이지, 결과를 보기에 편리한 방법은 아닙니다. 저희 어머님은 성경의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40일을 금식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이 40일을 실제로 금식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지요. 차라리 열심히 부동산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재테크를 했던 것이 더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편리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 기도의 대상이던 아들은 어머니가 40일을 금식하는 것을 보고도 자기 진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예언도 틀리고 말았죠.

믿는 것을 보며 사는 사람은 대단히 많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 재벌이 되겠다,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도 의외로 대책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우리 지구도, 한국도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는 대부분 헛소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니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곱게 자란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 즉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불과하더군요.

멀린님과 MBTI 이야기를 하다가 저보고 당연히 직관이 강하게 나오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저는 E, T, J는 항상 동일하지만, 가운데에서 N(직관)이 나오느냐, S(이성)이 나오느냐는 상황마다 다른 사람입니다. 게다가 오래 동안 투자를 하며 직관에 근거한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득해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직관은 헛된 욕망이나 wishful thinking과 구분하기 어려우며, 많은 경우 취약한 자존감을 가리기 위한 현실 부정의 수단이 되기도, 심하면 반지성주의로까지 진화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일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흠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면, 저는 어린 시절 광적으로 역사책을 섭렵하며 언젠가 자신도 그런 이들과 동등한 존재가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곤 했습니다. 했습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과 제 어린 시절을 비교하며 하루를 다 보낸 적도 있었죠. 그렇게 남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하루를 채울 때 꿈쟁이로 때운 대가는 참 참혹하더군요. 그 우스꽝스러운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 과거의 모든 것은 부정하고 새로운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그게 십대 이후 제 삶입니다.

예전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코지로와 대결을 하러 갈 때, 그 유명한 <간류지마의 결투> 전 일입니다. 신불에게 기도를 드리고 가라는 제자들의 제안에 무사시는 절에 잠깐 들를까 하다가,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나쁘다고 여겨 결국 절에 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부에서 이기게 되죠.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려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적어도 이십대 초반까지는 종교적 믿음을 대하는 제 자세 역시도, 분노와 원망에 더 가까웠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런 것에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나이가 드니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죽을 위기 앞에서도 살려달라거나, 회개할테니 천국에 보내 달라는 기도 같은 건 안 하게 되더군요.

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기독교도요.’ ‘나는 불교도요.’ 라고 하면 비즈니스 상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풍류판관 대통령교라는 쪽팔리는 말세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 일은 없습니다.



이성이냐 직관이냐 – 왜 멀린님과 계약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팀방송국 총수 자리를 수락하게 된 것은 지난 몇 년 간 얻게 된 교훈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를 이성이 대체한다고 해서 딱히 성과가 좋은 것도 아니더군요. 사실 원래 그렇습니다. 인생은 시험 성적이 잘 나오거나, 외국어를 잘 하게 된다거나 같이 계획대로 행동한다고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이 중년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나는 중산층이오.’하며 안심하고 살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을 희망한다면, 사실 논리적으로 짠 계획이 해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긴 합니다.

일례로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학점이 좋았기 때문에 법대로 전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단 법대로 전과하고 다시 한 단계 더 높은 KY의 법대로 편입하는 것이 정석처럼 간주되었죠. 실제로 그 코스를 밟은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법대를 가면 아버지가 사법고시를 시킬 것 같았고 예쁜 여자를 많이 만나는 게 지상 과제였던 저는 아버지가 사법고시를 시킬 게 무서워서, 한때 법조인을 꿈꿨음에도 불구하고 전과를 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법대를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런 저런 교양 수업이나 들으며 잘 놀았죠. 근데 이것 저것 교양 수업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해 대부분 A+을 받았고, 군대를 카투사(보통 사시를 준비하면 합격 후 법무관을 노려서 입대를 미룹니다)로 간 덕분에 토익 점수가 높았죠. 제대할 무렵 로스쿨이 생기더군요. 리트 시험을 보고 어렵지 않게 로스쿨에 입학한 뒤, 덜컹 변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 당시 사시를 준비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시험에 떨어져 제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을 무렵 겨우 로스쿨에 들어가거나 그때야 입대를 하더군요.

누군가는 이십대에 변호사가 된 저를 보고,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며 산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저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초기 기수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그렇게 높을 줄도 몰랐고, 그냥 들어가면 뭐든 되겠지라는 식으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죠.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가 뭐라도 하라고 그러길래 잔소리 듣기 싫어서 로스쿨에 진학한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서 다 잘 된 것만도 아닙니다. 데인 적도 많죠. 삼십이 넘어가다 보니, 이십대에 비해 인생이라는 도화지가 좀 더 채워져, 더 이상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최근 몇 년은 뭐라도 좀 성과를 내보고 싶은 욕망에 불타곤 했습니다. 한때는 아예 변호사가 쓰는 법률 의견서마냥(템플릿은 국내 최고의 법무법인 의견서를 참고했습니다), 맨 상단에 본인이 바라는 것을 적고, 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각 수단과 이에 따른 각 경우의 수, 본인 내부의 다수설과 소수설까지 총 망라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현황을 파악해 결정을 내보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죠. 근데 한 2년쯤 해봤는데 거진 100%의 확률로 틀린 결론만 내더군요. 차라리 이게 그냥 욕심인지 착각인지 자각 없이 감대로 찍었을 때보다도 더 결론이 나빠서 당황했습니다.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명확히 틀린 답도 있으니까요. 의사가 환자 배를 가를 때 자기가 끌리는 대로 가르면 안 되겠죠. 이성이란 전술한 것처럼 시험을 잘 보는 것 이외에도, 탐욕에서 자신을 지키고 반지성주의나 집단 광기 같은 것을 예방하는 데에 그 효과가 탁월합니다. 하지만 제 짧은 경험에 의하면 고작 그 뿐입니다. 매순간 내려야하는 그 결정의 순간에서 논리적 메커니즘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고요.

직관이 사람을 감정과 욕망에 휘말리게 한다면 이성은 별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에서, 결국 거창하게 썼지만 어차피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게 답인 듯 싶더군요. 어차피 미물로 태어난 인간이 자기 의지로 뭘 움직여 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오만인 것은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은 빌린 것에 불과하다, 잠깐 내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치 곧 흩어질 만다라나 파도처럼 그냥 내 것이 아니구나, 그런 결론이 나오더군요.

태극권 고수들은 제자들에게 ‘방송 방송’ 이런 말을 반복하는데, 이게 다른 말이 아니라 그냥 힘을 빼라는 소리입니다. 일단 자의식 과잉에서 해방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인생 별 거 없다는 생각을 하니 별로 힘 들어갈 일도 없더군요.

그래서 그냥 대충 살고 있는 중입니다. 왜 사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 달리 죽을 이유도 없으니까라고 밖에 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때 되면 알아서 죽을 텐데 억지로 죽는 것도 부자연스럽거든요. 폼 나게 승부수로 죽음을 택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 삶이 한심하다고 죽어버리면 그게 더 한심한 것 아니겠습니까?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는 게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자의식 과잉의 산물이죠.

누군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남겼고, 제대로 부딪혀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만 사실 인생은 부딪혀볼수록 운명론자가 될 수 밖에 없고 사는 대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작 인간나부랭이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겠습니까? 거창한 계획을 말하며 떠드느니 차라리 어차피 별 의미도 없는 인생, 좀 재미지게 불태워나 보자 이런 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인생의 어떤 결정이란, 이걸 꼭 해야해서가 아니라,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어서 내리게 되더군요.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즐거울 때는 즐겁고, 괴로울 때는 괴로울 텐데, 그럼 뭐 좀 더 색다른 걸 해봐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차피 올해 가을 쯤에는 게임 방송을 하나 시작할까 했는데, 게임 방송보다는 정치 시사 방송이 더 재미있을 것 같고, 그래서 원래 구상하던 계획의 일부로서 스팀방송국 총수직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같은 이유로 멀린님과 계속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권력자라면 괴벨스처럼 대책 없이 사람들을 선동할 사람은 멀리하는 게 답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전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딱히 위해될 것도 없거든요. 정석대로 산다면 중년이나 되어 겨우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어차피 그런 삶을 지향하지 않는 이상은 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포트폴리오에 넣고 가도 나쁠 것이 없겠죠. 뭔가 십달러로 만불을 만들려면 정상적인 루트를 이용해서는 안 될테니까요. 그런 이유로 저는 멀린님이 대단히 위험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멀린님과 계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팀방송국의 계획



누군가 스팀시티에는 미친 사람 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원래 어떤 혁신이라는 건 치밀한 비즈니스 모델을 베이스로 스텝 바이 스텝으로 밟아나가는 게 아니라, 몇몇 인간의 광기에서 비롯되는 거에요. 저는 이 관점을 스팀잇에도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뭔가 구체적인 구상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데서 뭔가 터질 것으로 저는 예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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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스팀방송국에 대한 제 계획입니다. 그렇게 될 지 안 될 지 모르고 앞으로 추진할지 안할지 모릅니다. 투자하라는 글 절대 아니고, 저나 멀린님이나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매우 주의해서 읽으셔야 해요.

조만간 암호화폐 베이스의 정치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하나 열 생각입니다. 이게 어떤 식이냐면, 4명 정도가 나와서 토론을 합니다. 근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토론이 아니예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토론이죠. 그리고 그 주제는 좀 자극적으로 픽할 생각입니다.

‘안희정 지사는 무죄가 나는가.’
‘드루킹 특검은 기각되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3개월 내에 50% 이하로 떨어지는가’

보통 이런 식으로 주제를 선택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예측 프로그램이라, 참여자들이 댓글로 결과에 대한 자기 의사를 표명하게 독려할 예측입니다. 참가 자격을 스파임대로 할지, 아니면 보팅과 댓글로 할지는 아직 생각 중이긴 합니다만 참가하셔서 결과를 맞추신 분에게는 모아 놓은 스팀파워로 일주일 간 보팅을 해준다던가, 또는 보팅 받은 스팀을 분배한다거나 이런 식이 되겠죠. 구체적인 방식은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스팀기반으로 하겠지만, 미래 예측이 들어간 프로그램인만큼 일정 이상 참가자들이 모아지면 참가자들의 의견을 빅 데이터로 수집 및 처리할 수 있고, 스팀과 유사한 형태로 임대가 가능한 코인을 개발하여 ICO 할 생각입니다.

일단은 제가 총수니까 제 돈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몇 회 차 정도 촬영을 하면 정부지원금 이런 걸 노려보겠지만, 첫 방송 주제가 ‘장하성은 6개월 내로 잘리는가’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퍽이나 좋아하시겠네요. 암호화폐에, 반 정부적 정치 프로그램에, 어떤 관점에서는 사행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정부가 싫어하는 것만 다 모아 놨군요. 참 잘도 지원금 타내겠습니다. 운이 좋으면 사모 투자자를 찾을 수는 있겠죠.

대박이 난다면 예전 딴지일보를 세운 김어준처럼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ICO한 코인이 거래소에 상장되어 부자가 될 수도 있겠죠. 긍정적인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스타트업이나 블록체인을 전문으로 내세우는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런 자기 이름을 총수로 건 스타트업을 운영했다는 게 나쁠 것은 없겠죠. 주식회사로 만들 생각이니까, 그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배우는 것도 나름 많겠네요. 역시 달리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반응이 안 좋거나 뭔가 실정법 위배 이슈가 있거나, 돈이 부족하면 다 엎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투자하라는 글이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스팀잇이라는, 다른 어떤 SNS보다도 지적 수준이 높은 분들이 모인 공간인 만큼 큰 걱정은 안 합니다만 예전 제가 말했던 것처럼 항상 저희를 의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두 달 안으로 첫 방송을 올릴 계획이며 패널을 모집 중에 있습니다. 대충 어떤 분이 참가하면 좋을지 혼자만의 구상은 끝났습니다만 실제 참여로 이어질지는 명확하지 않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댓글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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