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상당히 난해하다. 이야기의 큰 흐름은 존재하나, 세부적인 요소들은 많이 생략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들이 있다. 잘 만들어진 긴장감으로 관객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맛은 있다. 그런데 끌려가는 입장에서는 영화의 힘에 휩쓸려 끌려갈 뿐, 메시지에서 압도당한 건 아니다. 그렇게 160분을 시달리고 나오면 일단 멍하다. 그리고 천천히 감독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씬은 무슨 의도로 삽입되었는 지를 고민하게 된다. 영화를 곱씹어가며 생각을 정리하니 얼추 흐름이 잡힌다. 그제야 감탄이 나온다. ‘아 이런 의미였구나’
기본 도식이 색다른 건 아니다. 외지인은 악마고 무명(천우희)은 구원자, 일광(황정민)은 악마의 조력자이며 종구(곽도원)는 이들에게 걸려든 인간이다. 악마는 조력자를 통해 인간을 타락시키려 했으나, 구원자의 개입과 인간의 행동으로 실패한다. 제물이었던 인간의 딸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심은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의심에 휩쓸린 인간은 구원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파멸에 이른다.
이 뻔한 이야기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연출의 실패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다. 오히려 연출 자체는 환상적으로 좋다. 그 연출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집중된 것 뿐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고, 관객을 속이기 위해 함정을 가득 깔아놨다.
야간 경찰서 씬을 보자. 종구는 동료 경찰과 경찰서에서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나눈다. 그러다 정전이 일어나고, 비 오는 창밖에서 흉측한 몰골의 나체 여자를 본다. 다음 씬은 악몽에서 깬 종구다. 관객은 자연스레 경찰서에서의 일을 종구의 악몽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악몽이 아닌 현실이다. 관객은 그 사실을 종구가 동료에게 ‘그 나체여자가 목을 맨 여자’임을 말하는 순간에야 알게 된다.
이 패턴은 외지인의 습격 시퀀스에서도 나타난다. 무명의 인도에 의해 집안으로 들어간 종구,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무명은 사라지고 그녀를 찾던 종구는 괴물로 변한 외지인에게 습격당한다. 그리고 종구는 잠에서 깬다. 악몽으로 인지하게끔 편집되었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인해 관객은 저 습격이 사실인지 꿈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감독의 편집으로 곡성은 꿈과 현실이 혼재된 세계가 된다.** 불친절한 전개는 혼란을 강화한다. 그는 체계적인 스토리 전개보다는 가능한 많은 것을 생략하고 이미지를 나열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야기는 흐르는데 빈 곳은 많고, 추측할 증거는 너무나 적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 볼수록 혼란에 빠진다. <곡성>의 연출은 모호성을 증폭시켜 이러한 혼란을 유지시킨다.
불친절한 설명에 더해 감독 또한 대놓고 우리를 속인다. 일광의 굿과 외지인의 주술은 동시간대의 결투처럼 우리에게 보여진다. 일광이 정을 박아 넣을수록 외지인과 그에게 씌인 효진이가 고통받는다. 자연스레 우리는 황정민과 외지인을 대립 항으로 설정한다. 고통 받는 효진을 보다 못한 곽도원이 굿판을 깨부수는 것은 변수다. 일광의 허탈한 표정이 잡힌다. 굿을 끝내지 못한 일광은 다시 종구의 집을 찾는다. 무명 앞에서 그는 각혈을 하며 도망치고, 종구에게 자신이 판단을 잘못했다며 무명의 존재를 알린다. 일광의 활약을 본 우리로써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갈 수 밖에 없다.
진실은 다르다. 일광의 굿은 외지인이 아닌 효진을 죽이는 굿이다.(박춘배 가족의 죽음 현장서는 굿판의 흔적이 보인다. 즉 굿을 통해 악령을 확고히 집어넣고, 이들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거 아닐까) 외지인의 고통은 일광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에서 발생한 것 뿐이다. 곽도원의 깽판은 효진을 일시적으로 살려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활로 인해 곽도원은 일광을 믿게 되고, 그 결과 비극은 다시 진행된다. 천우희는 구원자였으나 선택 받지 못했다. 인간은 파멸한다.
얼기설기 짜여진 플롯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은 기존의 작품들과 결이 다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곡성>의 긴장감은 ‘행위’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 습격과 같은 놀래키는 액션은 없다. 약방 주인의 목격담에서 나오는 외지인의 습격은 단숨에 이뤄지지 않는다. 바위 뒤에 숨은 그에게 외지인은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곡성>은 오히려 그 전 단계에 집중한다. 문 뒤의 존재가 공개되지 않았을 때의 불안함, 내가 의지해야할 존재가 누군지 모르는 막막함 등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영화는 끝없이 우리를 속이고, 영화 속 종구 역시 끝없이 속아 넘어간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신의 순간에서는 작은 사물 하나조차 공포로 다가온다.
종구와 무명의 대립씬은 긴장과 공포의 절정이다. 하나는 집으로 가라하고, 하나는 남아있으라 한다. 선택 한 번에 가족들이 죽어나가는 순간, 그 순간의 심리가 연기, 연출, 촬영의 삼박자의 조화로 완벽하게 표현된다. 종구와 관객인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 놓였다. 영화는 정보를 주지 않고, 보는 우리도 무엇이 진실인 지 모른다. 평범한 이야기가 감독의 절묘한 연출로 인해 공포와 긴장 가득한 괴담이 되었다.
영화의 첫 씬은 낚시다. 외지인은 미끼를 걸고 강에 던진다. 그는 낚시를 하듯 사람들을 악에 깃들게 만든다. 그 미끼에 물린 것이 종구였을 뿐이다. 낚인 것은 종구뿐만 아니다. 우리 역시 영화에 낚였다. 영화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던지고, 우리는 그 중 하나에 물려 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핀다. 굿이 어중간하게 끝난 뒤, 일광은 점을 치고 ‘미끼를 물었다’며 다시 곡성으로 향한다. 누가 어떤 미끼를 물었단 말인가? 미끼를 문 건 종구와 관객 모두일 지도 모른다. 종구는 일광과 외지인의 손에서 놀아난다. 우리는 감독의 손에서 놀아난다.
“자네는 나갈 수 없어”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이삼에게 외지인은 말한다.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아니 믿을 수 있나? 중요한 건 그가 무엇을 믿느냐다. 이삼은 그를 악마라 생각했고, 그가 악마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다. 종구는 그를 죽여야 할 존재라 생각했고, 그러기에 그를 죽일 수 있다. 무명을 믿지 못했기에 종구는 가족을 잃고 폐인이 된다. 불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 관객 역시 그러하다. 끝없는 함정의 향연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누가 같은 편인지 알 수 없다.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생각할 여지는 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완벽했다. 천우희, 황정민, 곽도원이야 명불허전이고, 특히 악마의 씌인 소녀로 분한 김환희의 연기가 너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남는 것은 나홍진이 구현해낸 이미지뿐이다. 그만큼 나홍진의 연출은 완벽했고, 구성도 좋았다. 생전 본 적 없는 구성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 충격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 영화를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곡성>은 끝날 때까지 다음 일을 예측할 수 없고, 그렇기에 끝나고 나서야 정리가 되는 영화다. 영화 자체가 모호하듯, 해석의 여지도 다양하다.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힌 상태서 영화를 본다면,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곡성>은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관객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나, 답을 주지는 않는다. 혼돈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정은 혼돈이지만,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영화를 통해 위안과 만족을 얻는게 주라면 이 영화는 최악의 영화다. 반면 영화의 숨은 뜻을 찾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다. 괴작은 괴작인데, 엄청나게 잘 만든 괴작이다.
p.s) 영화의 해석 여지는 다양하다. 나는 그저 "일광이 살을 날린 것은 효진"이라는 나홍진 감독의 말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을 뿐이다.
"넌 네 의심을 확인하러 왔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