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꾸려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설렘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방을 쌀 때? 출국 수속을 할 때? 비행기에 올라 탈 때? 여행지에 도착해 공항을 나설 때?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기내식과 맥주 한 캔을 먹을 때면 ‘아! 여행이다.’ 하는
벅찬 감정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 공짜 술이 좋아, 하염없이 홀짝 마시다 보면
장거리 비행이 훌쩍 지나있는 것이 좋았다. 이렇게 술로 시작된 여행은 보통
술과 함께 흐르다 술로 마무리 되곤 했다. 여행과 술을 어떻게 뗄 수 있을까?
술꾼인 내게 ‘술’은 언제 마셔도 기분 좋지만(지독한 숙취에 속이 뒤집어진 날만은 예외로 치자)
여행에서 마시는 술은 더 특별하고 즐겁다. 여행에서의 술은 단지 ‘술’에 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술은 여행지의 문화이고 역사이고 현지인들 인생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여행에서 만나는 술은 더 뜻 깊다. 특히 전통주는 더 그렇다.
내가 여행을 다니며 맛 봤던 세계 여러 곳의 특별한 전통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라다크, 막걸리와 비슷한 술 <창>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라다크는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있는 고산지역이다. 세 얼간이의 엔딩 배경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던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투영한 호수는 판공초로 라다크의 대표 관광지역이기도 하다. 그 영화의 장면처럼 라다크는 거짓말처럼 새파란 하늘과 몽글거리는 흰 양떼구름을 품고 있고, 어디를 가든 눈이 살포시 쌓인 원시의 산들이 널려있다.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티베트와 아주 비슷한 이 지역은 보리로 만든 곡주 <창>을 마신다. 일 년에 8개월이 겨울인 이 척박한 지역에서 보리는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곡물이다. 보릿가루는 겨울에 그들의 배를 채우게 하고, 보리로 만든 술-창은 지루한 겨울의 벗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창은 언뜻 보면 식혜라고 착각할 정도로 뿌옇고 회색빛을 띄는 술인데 걸쭉하지는 않고 맑은 편이다. 맛은 막걸리와 비슷하지만 더 신맛이 강하고 단맛이 없다. 시중에 유통되는 술이 아니라 각자 집에서 손수 만들어 먹는 술이기에 먹을 때 마다 그 맛과 농도는 매번 다르다. 창을 담그고 다 먹으면 발효시킨 보리에 계속 물을 채워서 먹게 되는 데 가장 최초로 얻는 술은 <마추>라 불리며 가장 최고의 품질로 친다. <마추>는 화이트 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고급스럽고 알콜 농도도 쎄다.
라다크 젊은이들은 평소에는 맥주나 럼을 마시지만, 특별한 날, 결혼식이나 라다크식 설-로싸르에는 온 가족이 모여 창을 나누어 마시곤 한다. 창은 술집에서 구할 수 있는 술이 아니기에 보통 가정집에서 팔거나, 아니면 가정집에서 만든 창을 얻어야지만 먹을 수 있다. 거기서 의외의 즐거움이 생긴다.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미로같은 길을 꼬불꼬불 들어가야만 창을 만드는 할머니의 집을 찾을 수 있다. 전통 옷을 입고 붉은 볼을 가진 할머니의 순박한 웃음과 함께 하는 술은 뭔가 더 정겹다. 또 할머니는 창을 담은 병에 보릿가루와 버터를 발라주며 ‘신의 가호’를 빌어주니 부처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착각이 들어 절로 경건하게 술을 마시게 된다.
터키, 무색의 치명적인 술 <라크>
터키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기에 술이 금기시 되는 여타의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술에 개방적이다. 터키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을 늘상 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즐긴다. 서울의 명동과도 같은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에 가면 길가 양 옆으로 줄지은 노천술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이 바글거린다. 술을 마시다가 흥이 나면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 몸을 흔들어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왜 한국 사람과 터키 사람이 기질이 비슷하다고 하는 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테이블에는 생맥주나 터키의 국민 맥주 에페스가 놓여있지만 가끔 투명한 병에 담긴 무색의 술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라크다.
터키의 전통 술인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엑기스에 허브의 일종인 아니스(anise)란 식물의 즙을 넣어 향을 낸 술이다. 우리 나라의 소주처럼 대중적인 술이나 알콜 도수는 그에 두 배에 달하는 독한 술이다. 독하기도 하고 허브 때문에 독특한 고유의 향을 가지고 있어 싫어하는 사람은 한번 맛보고 다시 입을 대기도 꺼려할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술이다. 라크는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도 하지만 보통은 물을 넣고 1 :1로 희석 시켜 먹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재밌게도 투명한 라크에 투명한 물을 넣으면 우윳빛을 띄어서 마치 연금술사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라크의 맛은 약간 달콤하면서도 시큼하고 약한 치즈향이 나는데, 알콜 냄새가 강해서 독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취하도록 마시기는 힘든 술이다. 가끔 가정 집에 초대 받았을 때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가벼이 즐기는 정도가 딱 좋다. 과거에는 정부에서 독점생산 했다지만 이제는 여러 지역의 민영회사에서 생산, 판매가 가능해져 20 여종의 라크가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대중적으로 먹는 브랜드는 예니 라크이다. 터키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라크 한 잔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라크는 터키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독일, 맥주 말고 사과주! <아펠바인>
‘독일의 술’ 하면 누구나 당연스레 맥주를 떠올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는 독일 뮌헨에서 열리고, 독일 전국에는 1300개가 넘는 맥주 양조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에 맥주 말고도 유명한 술이 있으니 바로 사과주-아펠바인이다. 웬 사과주?
사과주하면 우리는 소주와 설탕을 함께 버무려 숙성시켜 먹는 우리나라식 과실주를 생각하기 마련이나 이 아펠바인은 사과와인이다. 포도 농가들이 대규모 흉작을 경험한 이후에 사과 농사로 품종을 바꾸면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꿩 대신 닭’이라는 느낌으로 포도주 대신 만들기 시작한 게 의외로 독일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과주가 유명한 지역은 독일 공항 도시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이다. 프랑크푸르트는 공항이 있기 때문에 다들 어쩔 수 없이 방문할 뿐 그다지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밋밋한 곳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이 아펠바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강 건너 작센하우젠 지구는 아펠바인의 명소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대학로 한두 골목만 한 이 곳은 프랑크푸르크의 서민적인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적인 거리로 아펠바인을 파는 주점이 주욱 늘어서 있다.
아펠바인, 그 맛은 어떨까? 약간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강하고 사과향은 희미하게 입에 맴돈다. 신맛이 강해서인지 혹자는 사과 식초와 같다고 평하기도 한다. 보통 원액을 주면 그 자체로 먹거나, 물이나 소다수 등을 입맛에 따라 섞어 마시면 된다. 신맛이 강하고 단맛이 약한 편이라 레몬에이드나 콜라 환타 등 달달한 탄산음료수와 섞어 마시면 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알코올 농도가 고작 4%에 지나지 않지만 술 맛이 강하게 나서 홀짝홀짝 마시다보면 생각보다 취하게 된다. 소박한 주점에 앉아 한 켠에서 흘러나오는 축구 중계 소리와 열광하는 독일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마시는 아펠바인은 가장 소소한 여행의 일부분이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에는 언제나 술이 함께했고, 술이 함께한 여행의 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취기에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말 사람들은 인연이 된다. 다양한 목적의 여행은 있겠지만, 여행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결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가까워지기 위해서 술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행을 ‘술을 함께 나눠 마시며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어딘가를 떠날 때면 늘 곧 만날 새로운 술과 사람의 기대로 가득 차고, 술이 마시고 싶을 때면 난 늘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어진다. 난생 처음 보는 술을 기울이며,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에 난 지금도 침이 꼴깍 목을 타고 내려가고 귀가 근질근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