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방 오른쪽 벽엔 작은 책장이 있어요
한달에 한번 열어보면 많이 열었다 싶을 정도로 손길이 뜸한 책장인데
그 곳 가장 아래칸 구석에 작은 사진첩이 하나 숨어있어요
제 유년시절이 날 것 그대로 남아 있는 사진첩
그 사진첩에서 제가 낯선 누군가와 친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 한장 있어요
그 사진의 친구는 몇 년 동안 저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죠
그런데 몇일 전, 사진첩을 다시 봤어요
갑자기 그 낯선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거든요
동글한 코, 작은 눈, 그리고 어딘가 개구져보이는 웃음까지
지금까지 절친하게 친구가 거기 있지 뭐에요
저도 잊고 심지어 친구도 잊었던 녀석의 리즈시절이 사진첩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요
오늘은 이 친구의 뒷담화를 해볼까해요
이 친구는 굉장히 의리가 있는 친구에요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날 당장 달려와 주는 고마운 녀석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리가 엄청 없기도 해요
여자와 있으면 약속시간을 절대로 지키지 않아요
한 두 시간씩 미루다 하루가 지나간 적도 있어요
그리고 돈을 엄청 자주 빌려요
만원, 이만원 작은 액수를 수시로 빌려대는 빚쟁이지만,
늦어도 일주일 안에 꼬박꼬박 이자쳐서 입금하는 프로 빚쟁이에요
그런 주제에 자신이 의리뺴면 시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요
제 친구는 좀비라도 되는걸까요
시체가 어떻게 걸어다니는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이 친구는 참 좋은 친구에요
따뜻한 커피 향기가 맴도는 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각자 할 일을 하더라도
만나는 게 의미가 있는 그런 친구
제가 힘들고 슬플 때 말 없이 술잔을 채워주는 친구
20년 동안 변함 없이 항상 한결 같은 친구
저는 이런 우정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