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부리 영감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원 이야기에서 재구성할 부분을 추려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하여 짧은 요약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목에 혹이 달린 영감이 하루는 숲속 외딴 집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몹시 좋아서 근처에 있던 도깨비들이 몰려 왔다. 도깨비 두목이 "노인, 그 노랫소리의 비결이 무엇이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농담삼아 "목에 달린 혹이 그 비밀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깨비 두목은 재물을 던져 주고 혹을 떼어 갔다.
이웃에 살던 다른 혹부리영감이 소문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근처의 도깨비들이 몰려와 묻기를, 그 노랫소리의 비결이 무었이냐 하였더니 노인이 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도깨비 두목은 "그 전에 어떤 영감이 와서 거짓말을 하더니,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하면서 다른 편에 혹을 하나 더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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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떼려 혹 붙인다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이 이야기에 담긴 뜻을 권선징악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실상 등장인물들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악한 인물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혹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도깨비들을 선악의 구분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 하면, 혹을 뗀 영감 A 나 혹을 붙인 영감 B 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물들입니다.
노래를 잘 한 A 가 과연 선인이라고 부를 사람이었을까요? 자기 몸에 붙은 혹을 떼고자 했던 B 가 무슨 험악한 악인이었을까요? 아니 그럼 내 몸에 붙은 혹을 떼려고 하지 말란 뜻이여 뭐여;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소리여 하고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공부를 하면서 저는 이 이야기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도깨비 마음에 달린 혹의 행방.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고 그저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만 있었던 두 혹부리 영감들. 그러나 한 쪽은 혹을 떼고 다른 쪽은 혹을 붙였습니다.
아하,
도깨비들은 바로 의학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전병을 가진 어떤 환자 A가 일반인들과 뚜렷하게 다른 두 형질 a1= 돌연변이 DNA 서열의 보유 , a2 = 유전병의 형질 (예를 들면, 돌연변이 단백질이 합성되는 것) 를 가진다고 할 때, 형질 a1 과 a2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편한 방법 중의 하나는 한 형질을 제거하고 표적 형질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DNA 서열을 유전자 가위(CRISPR) 를 통해 제거하거나 DNA 의 전사-번역 과정을 방해하는 miRNA 등을 투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전병의 형질이 과연 사라지는지 확인하는 것이죠.(Genetic Knockdown)
물론 이런 종류의 시술은 환자의 몸에서 제거되는 형질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으며, 때문에 안정성이 철저하게 입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몸을 대상으로 시술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유전자 가위를 사람응 대상으로 쓰지 못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연구자들은 모델 생명체를 이용한 실험을 기획하고 있죠.
혹부리 영감 A 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혹부리 영감은 혹을 달고 있고, 노래를 잘 합니다. 노래를 잘 한다는 것은 분명히 성대라던지, 폐활량이라던지 하는 다양한 형질들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연구자들이 신이 아닌 이상 이 모든 형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연구대상의 응답과 두 형질을 토대로 도깨비 연구자는 간단한 가설을 세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혹을 가지고 있으면 - 노래를 잘 한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도깨비 연구원는 만고의 불치병으로 여겼던 음치를 치료할 꿈을 꿨을지도 모릅니다. 이거, 잘만 하면 졸업은 물론이고 작은 대학의 교수 자리도 노려볼 수 있겠는걸요
연구원은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기획합니다.
혹이 없다면 - 노래를 잘 못 할까?
그리고 실험을 시행해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결과를 알고 있죠.
혹을 제거했는데 - 노래를 잘 한다 (!)
가설에는 반례가 나타났고, 그렇다면 가설을 수정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가끔씩 고집을 부려봅니다. 한 번의 반례로는 가설을 폐기하기 충분하지 않고, 실험 자체의 문제가 있었을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 실험에 누군가의 졸업이 달려있는 문제일수도 있거든요 ㅎㅎ 연구원은 이전의 실패를 발판 삼아 조금 다른 실험을 기획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연구자가 살을 찌게 만드는 하는 유전자 서열을 찾았다고 합시다.
이 서열이 정말로 살을 찌게 하는 DNA 서열인지 확인하는 방법에는 앞서 말한대로 DNA 서열을 제거하고 체중이 감소하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서열을 더 많이 가진 개체를 만들어서 체중이 더 증가하는지 보는 방법도 있겠죠? (Overexpression)
연구원은 혹부리 영감 B 를 잡아다가 혹을 하나 더 붙입니다. 앞서 실험했던 형질 a1 을 과다발현시키고 표적 형질 a2 에 어떤 영향이 가해지는지 본 것이죠.
그러나 혹부리 영감 B 는 원래 노래를 잘 못했고, 혹을 이식받고도 노래룰 하지 못했습니다. 실험이 완전히 실패해버린 것이죠. 이런! 음치를 치료하겠다는 도깨비 연구자의 원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군요. 어쩌면 교수님에게 한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할 생각이 있냐 없냐 하면서 말이죠.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명료합니다. 가설을 잘 세워야 합니다.
가설을 세우기 전에 1) 혹을 가진 인간 중 노래를 잘 하는 인간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2) 혹을 가지지 않은 인간 중 노래를 잘 하는 인간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3) 혹을 가졌지만 노래를 못하는 인간의 비율, 4) 혹이 없고 노래도 못하는 인간의 비율
정도는 확인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뒤에도 가설 설정을 돕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하지만, 여기서 떠들 내용은 아닌 듯하여 줄이겠습니다.
이 기나긴 과정을 패스하고 바로 실험에 들어가버린 도깨비 연구원이 얼마나 조인트를 까였을지.. 인간실험윤리위원회의 허가는 과연 받았을지.. 안 받았으면 징계위원회 직빵일텐데..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군요
도깨비 연구원의 눈물로 얼룩진 실험일지. 혹부리 영감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m.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blio.bid=6802013
혹부리 영감, 애플비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