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Yohann Wolfgang von Goethe / 박찬기 옮김
내가 베르테르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께서 어떤 이유에선지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베르테르가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거쳐서 온 권총으로 자살 하는 장면을 이야기 하여 주셨고 그 장면이 나의 머릿속에 남아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책장에 꽂혀있던 세로로 쓰여진 세계 문학 전집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꺼내서 읽었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기억에 남았던 것은 로테라는 여인과 베르테르의 죽음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베르테르를 오랜 기간 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베르테르와 전혀 관계 없는 좀머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뜬금 없이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오른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는 전쟁 후를 그리는 모습 그리고 약간은 허무주의 (또는 실존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작가의 분위기 때문에 내 스스로도 이해가 갔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는 정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다음날 도서실로 가서 이 책을 뽑아 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25년이 지나서 만난 베르테르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선적으로 이미 나의 나이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베르테르의 아버지가 될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테의 경우는 거짓말 안 보태도 딸이 될 정도의 나이가 아닌가!
그래도…
베르테르는 나에게 다른 감동을 주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잊지 말아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신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책은 베르테르가 그의 벗인 빌헬름에게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771년 5월 4일자의 편지로 시작해서 1772년 12월 4일 (실제로는 12월 20일까지의 편지가 편자로부터 독자에게를 통해서 실려있다)까지가 실려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빌헬름이 아닌 로테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 편자로부터 독자에게에는 베르테르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절정의 부분이어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책의 앞부분 역시 베르테르라는 사람의 생각을 소개하는 형식을 띠고 있어서 앞부분을 읽을 때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우선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괴테는 인간을 평등하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의 첫 부분에 베르테르는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표현을 한다 (Goethe 17). 괴테에 의하면 (베르테르의 편지를 통해서 말하는 괴테의 표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들이 평등하지 못하고, 또 평등해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존경받기 위해서 이른바 천한 사람을 일부러 멀리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마치 패배하는 것이 두려워서 원수를 보고 도망치는 비겁한 친구나 마찬가지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생각에 일정 부분을 동의를 한다. 하지만 괴테는 이러한 불평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베르테르가 서민들을 바라보면서 약간 경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2부를 살펴보면 베르테르가 로테를 떠나서 B라는 여인을 만나고 C라는 백작의 집에 초대 되었을 때 귀족으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베르테르의 불쾌감을 보여준다. 가장 큰 베르테르의 슬픔은 로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슬픔의 하나가 이러한 사회계층의 문제 바꾸어 말하면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부르주아의 슬픔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그리고 이 부분을 살펴보면 베르테르가 공사 밑에서 일을 하면서 겪는 좌절 또는 이겨 낼 수 없었던 상사와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일들 역시 그의 슬픔에 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보게 되면 베르테르의 사랑에 관한 의견이다.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고 생각 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면 바로 다음 부분이다.
<여보시오, 젊은 양반, 내 말 좀 들어봐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가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돼요. 자기의 시간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일하는데 쓰고, 다른 한쪽, 즉 쉬는 시간을 여자에게 바치도록 해야지요. 당신의 재산을 헤아려보고 꼭 필요한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를 가지고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쯤은 나도 말리지 않아요. 그것도 너무 자주 해서는 못쓰고 여자의 생일이라든가 세레일 같은 날에만 해야지요.> 만약에 그 젊은이가 그런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만한 인물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Goethe 26)
정말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의 나의 모습은 충고를 하는 “어떤 공직에 있는 속물 (Goethe 24)”과 같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사랑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인가? 위의 구절 뒤에 한 구절이 더 있는데 그 구절에는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도 마지막이지 (Goethe 26)”라고 하는데 실제로 예술의 대가들은 연인과 사랑에 빠지듯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 같다.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트랜드가 예술을 위해 모든 것, 자신의 삶을 전부 바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나이에서 이들을 바라볼 때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베르테르에게 더 많은 친숙함을 느낀다. 달과 6펜스를 지은 서머셋 몸 (Somerset Maugham)의 또 다른 작품인 인간의 굴레의 주인공인 필립스 캐어리 역시 베르테르처럼 한 여인에 모든 것을 바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았다. 10대의 철없던 짝사랑의 시절, 20대때의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사랑을 하려던 베르테르와 같은 열정을 품었던, 죽음과 맞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워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베르테르는 자연과 단순함을 찬미 했지만 그의 삶은 로테로 인하여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은 로테의 손을 통해서 건네어 받은 (비록 하인을 통하였지만) 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정말로 삶은 쇼팬하우어의 말처럼 “이 세상은 어디에나 불행이 가득 차”있는 걸까? (11). 베르테르는 쇼팬하우어도 하지 못했던 방법을 선택하여서 불행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 단순한 해설을 본다면 괴테의 삶을 반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내가 만난 베르테르는 10대때의 순수함 어쩌면 단순함으로 볼 수 없는 여러 복잡한 면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베르테르의 슬픔이 모든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 되는 것일까? 필립스 케어리가 겪었던 것처럼? 필립스는 베르테르나 스트릭트랜드처럼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일까? 베르테르는 슬픈 세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그의 죽음을 방조한 로테는 세상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이는 정말로 베르테르의 슬픔인가 아니면 로테에게 안겨줄 슬픔인가. 나는 이런 여러 질문을 안고 베르테르와의 만남을 접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