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남북장관급회담이 열린 2002년 이후 16년만에 우리나라 가수들이 평양의 무대에 섰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 무르익었던 2002년의 여름은 뜨겁기도 했으며 시리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월드컵의 열기에만 빠져있었지 서해에서 일어난 교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교전을 주고 받고, 장관급회담을 진행하고, 공연을 진행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 불과 몇 달을 사이에 두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하다.
그때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여러해 동안 걸쳐 일어날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있다. 이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계산이 깔려있는지는 두고보면 알 일이다.
어제 열린 공연이 평창올림픽 기간에 열린 북측예술단의 공연에 대한 답방인지 아니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16년만에 문화적인 교감을 주고받는 것에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싶다.
2002년도의 공연은 사실 잘 기억에 나질 않는다. 조용필과 이미자같은 대가수들의 무대와 윤도현이 자신들을 '놀세때'라고 칭하며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모습, 그리고 북쪽의 관객들이 젝스키스와 특히 베이비복스를 보며 동공지진, 이 화면은 정지화면이 아닙니다와 같은 반응들만 단편적으로 기억날 뿐이다.
북쪽에 현송월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윤상이 있다. 정부에서 윤상을 감독의 자리에 앉힌 걸 보면 아무생각 없이 준비하지는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탁상머리 앞에서 대충 정해진 것이 아닌 탁현민 행정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가수로서의 윤상도 훌륭하다. 그렇지만 그는 프로듀서일 때 더욱 빛난다.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는 그다. 저 옛날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부터 요즘 러블리즈의 'Ah-choo'에 이르기까지, EDM을 비롯한 여러장르에 능하다는 것이 그가 감독의 자리에 앉기에 충분한 이유들이다.
함께 갈 가수의 선정부터 공연에 올릴 노래를 선곡하는 것에 윤상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요청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의 의중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감독 윤상의 마음속, 북한의 숨은 의중을 파악할 수는 없다. 그저 내 멋대로 선곡의 의미와 가사의 내용을 해석해 보기로 했다. 물론 진지모드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또 나만 재미있으면 아니되는데...나도 재미없으면 큰일이다. 병맛과 진지사이에서 써보기로 한다.
정인 - 오르막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정인의 다른곡 장마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스키점프대를 함께 힘을 합쳐 오르는 무한도전 멤버들이 생각났다. 혼자서는 쉽게 오르지 못 할 오르막의 출발선에 함께 있다. 옆에서 우리를 시기해 잡아 끄는 힘에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필요하다.
알리 - 펑펑
엉엉 울고싶은 날엔
널 안고싶은 날엔
사랑하나봐 난 아직도
이런 그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우리는 매번 끌려다니며 펑펑 울고 지냈다. 지난 20년 동안 끈임없는 구애와, 시기어린 질투의 사이를 오고갔다. 더 이상의 반복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 더 이상의 찌질함도 용납할 수 없다. 이별앞에 찌질함은 용서해도, 안보앞에 찌질함은 용서가 안된다. 갑자기 떠오르는 노래 '달이 차오른다 가자'
백지영 - 총 맞은 것처럼
총맞은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 그냥 웃었어
그냥
평양 대학생들이 남쪽의 노래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란다. 처음 듣고 얼마나 놀랬을까. 우리에게도 발매 당시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그래도 그 가사의 담긴 의미를 아는가보다. 너네 사랑 좀 해봤구나.
잊지말아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노래의 가사는 지난 65년을 관통하는 것처럼 들린다.
공연도 중요하지만 떨어져 지낸 세월을 이어주는 만남도 중요하다. 올해는 이뤄질까.
강산에 - 라구요
내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강산에의 부모는 모두 함경남도 출신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번 무대는 더욱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다 잠시 눈물을 울컥할 뻔 했지만, 울대를 울려 벅찬 감동을 목소리로 대신 전달했다. 일부 관객들도 함께 울었다. 1부의 공연은 이 노래로도 충분했다.
명태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쉈소 어
명태 명태 라고 흠흐흐흐 쯔쯔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음성지원이 안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당연하듯이 그에게도 함경도 억양이 남아있다. 강산에는 노래를 마치고 이 말을 인사로 대신했다. '동해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는 명태처럼,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YB -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주 가는 사람이 약속은 왜 해
눈멀도록 바다만 지키게 하고
사랑했었단말은 하지도 마세요
(중략)쓸쓸한 표정짓고 돌아서서 웃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북한의 신청곡이다.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심수봉의 목소리는 울림을 주는가 보다.
이제 막 항구에 도달하려는 저 배가 오래 정박해야 할텐데...배 나온 그 남자의 배, 날래 오라우.
나는 나비
거미줄을 피해 날아 꽃을 찾아 날아
사마귀를 피해 날아 꽃을 찾아 날아
꽃들의 사랑을 전하는 나비
애벌레는 언제 허물을 벗고 자유롭게 날 수 있을까.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대왕거미는 요새 친한 척이 부쩍 늘었다. 우리에게도, 북쪽에게도, 능글맞다. 곤충의 왕을 자처하며 장기집권에 들어간 풍만한 사마귀, 앞 다리를 오므리고 입을 앙 다문채 속내를 좀 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교활하다. 바다건너 뇌염모기는 이지매를 당하는 것 같아 서럽고 또 서럽다, 빨대를 꽂자니 끼어들 틈이 없다. 바다를 건넌 촛불에 타 버릴 것만 같다, 얍실하다.
레드벨벳 - 빨간맛
그러니 말해 그래 그래 말해
그러니 말해 그래 그래 말해
너의 색깔로
날 물들여줘 더 진하게 강렬하게
레드벨벳은 김정은의 요청이었을까. 단체사진을 찍는 그의 볼이 발그레하다. 그의 요청이었다면 저 가사는 너무 무섭다. 물들고 싶지않다, 궁금하지도 않다. 김정은은 Honey가 되고 싶었을까. 왜 갔는지 모를, 차라리 러블리즈의 'Ah-choo'가 낫지 않았을까. 자본주의 체재선전일까?
최진희 - 사랑의 미로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마오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최진희가 네번이나 평양에 다녀온 것엔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도 종종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곤 하는 노래. 세대를 아우르고 이념을 넘어서는 접점을 가진 노래가 아닐까. 그 접점을 향해가는 미로에 서있고, 그 옆에선 훈수두기에 바쁘다. 언제쯤 다 패싱할 날이 올 것인가.
뒤늦은 후회(원곡 : 현이와 덕이)
북한의 요청곡. 김정은이 생전에 좋아했던 곡이란다. 혼자 영화만큼이나 남쪽 노래 많이도 들었나 보다.
아들내미도 아버지만큼이나 뒤 늦은 후회가 없기를 바라본다.
이선희 - J에게
J가 누구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부자에게 가져다 붙이지는 말자.
지난 평창의 공연에서 이선희와 북측가수가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한다. 북에서도 많은 이들이 아는 노래라 한다. 그래서 였을까. 이선희는 함께 부르자며 마이크를 객석으로 건넸다. 찰나의 순간, 서로가 민망하지 않을정도의 시간에 마이크는 다시 그녀의 입으로 돌아왔다. 역시 보통 내공은 아니다.
알고 싶어요
때로는일기장에
내얘기도쓰시나요.
날 만나 행복했나요.
이제 혼자 쓰는 일기는 덮어두고 주고받는 펜팔을 쓸 때이다. 그런데 이 펜팔 기밀이다.
무성이형 듣고 있나요? 아, 이제 레드준표의 시대인가. 제발 이번에는 그 입 좀 다물라.
아름다운 강산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희망을
1부에 라구요가 있었다면 2부에는 이 노래로 충분하지 않을까. 언제쯤 섬인 듯 섬과 같은 섬과 같던 강산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 그 겨울의 찻집
내일 모레면 일흔을 앞둔 가왕은 여전했다. 아직은 가왕의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듯 열창을 이어갔다. 감기에 걸려 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감동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꿈 + 단발머리 + 여행을 떠나요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예전에 우리가 희망을 찾아 서울로 몰려들었 듯 남쪽의 도시로 내려오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그날이 온다면 우리도 꿈에 그리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눈물의 의미가 그때와는 다르기를 바라본다.
서현 - 푸른 버드나무
공연의 사회를 보던 서현이 가수들의 공연이 끝나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현은 차분하고 침착하게 공연을 진행했다. 서현을 비롯한 모든 가수들이 프롬프터의 글자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음을 공연내내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한 북쪽의 노래를 부르자 관객석이 들썩였다. 이제까지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감정들을 표출해냈다. 그때야 비로소 김정은이 맨 위에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는 마지막에서야 화면에 나타났으니까. 뉴스를 제외한 화면에서 북한의 지도자를 본 것이 나는 처음이었다.
합창 - 친구여 + 다시 만납시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
너무 진부한 선곡이지만 아직 그 노래에 담긴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진부하게 들릴 수 없었다. 공연을 보면서도 과연 이른 시간안에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는 것인지, 그것도 처음으로 남쪽에서 열리는 것이 이루어질 것인지 아직은 실감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반대로 통일이 될 것 같은 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또 떨어져 지낸 시간이 오래될수록 소원이 우리 전부의 마음으로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 또한 왜 통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그저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