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별담] 500원짜리 동전은 있었지만 코인 노래방 문 닫아 못 가서 쓰는 노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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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스로를 어떤 세대냐로 규정 지을 것은 가는 나도 모른다. 내 시절엔 교과서 이름 바꾸기가 유행이었다. 국어 교과서를 복어로 바꾼다던지, 그 외엔 기억이 안난다. 나는 그런 짓거리는 안했으니까. 학원 벽면에 'HOT'로 써진 글자를 '설운도'로 바꿀 방법을 안다면 내 세대로 나는 규정하겠다.

노래를 못 부르고 온 걸 글로서 승화하리라.

내 기억에 가요의 가사를 처음 온전히 외웠던 건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가르쳐준 김원중의 '바위섬'이었다. 같이 배웠던 신형원의 '터'도 가요로 불러야 할까. '개똥벌레'는 이미 유치원 때 때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가르쳐준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의 3.4조의 시조는 첫 수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바위섬'은 지금도 눈감고도 부르겠다. 친척 어른들끼리 따라 간 노래방에서 나는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항상 95점 이상이었다. 기억은 편집 된다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랬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외운 가요의 가사는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 였다. 스탠드 마이크를 잡고, 선글라스를 끼고, 쌍권총을 쏴대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따라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채통을 지켰다. 그것이 채통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 안지켰다면 후천적인 꿈트림도 살았을까. 아니었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그 다음은 '내사랑 내곁에' 였다. 어린 놈이 멀 알았는지, 그런 노래에 꽂혔었다. 그 남자의 생전의 노래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간 11월이 되면 그의 노래가 지금보다 좁은 지상파 tv 채널에서 울려 퍼졌었다. 너무 좋았다. 김현식의 노래보다 김광석의 노래를 먼저 들었다면 달라졌을까. 아닐 것이다. 김현식과 김광석의 감성은 다르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부터 나는 김현식의 감성이 더 좋았다.

오늘은 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누군가랑 같이 가서 부르면 기겁을 하니 혼자서 부르고 싶을 수밖에. 노래가 기괴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울부짓는 나를 기겁하는 것일까.

하현우 버젼도 좋지만, 나는 커버 곡 보다는 원곡을 좋아하는 편이다.

한창 노래방을 다니던 고등학교 때 노래방을 가면 첫 곡의 번호는 '3800'이었다. '해질 무렵 날 끌고 간...'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노래였으니 너도 나도 마이크를 먼저 잡는 놈이 우선이었다. 발걸음으로 목을 풀면 '272' 내사랑 내곁에로 내 맘대로 넘어갔다. 담배도 안 피던 시절 허스키 보이스를 흉내 낼 수 있었을까. 나중에 알았다. 그 노래가 김현식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연습삼아 불렀다는 것을. 부활의 '사랑할수록'을 부른 김재기처럼.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도 좋았지만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더 많이 불렀던 것 같다. 그 감성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때는 안다고 했을지도.

박남정의 '니은 니은' 춤과 김성재의 아이스하키 복장을 한 그 사이의 가요계는 기억나지만, 나는 이수만을 극도록 싫어했다. 저 아저씨가 가요계를 가수에서 엔터테이너로 판을 바꿨다고 생각해서 싫어했다. 그래서 벽면의 'HOT'를 '설운도'로 열심히 고쳐썼다. 반발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2등을 응원했다. 여섯개의 수정을 응원했다. 제일 인기 없을 것 같던, 로봇 형을 응원했었다.

듣도 보도 못 한 판씨 성을 가진 유걸이 형이 학교 옥상에서 소리를 지르더니, 스타가 되었다. 그때 였을까.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형에 '호우형' '창용불패'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할 홍경민이 있었다. '안돼 송'으로 유명해 졌지만, 그때 판유걸이 판을 칠 때, 홍경민은 가수인데 리포터로 노래가 아닌 말로서 얼굴을 알리고 있었다.

'앙팡 테리블' 별명을 가진 축구선수 고종수를 좋아했다. 그가 홍경민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다. 리포터도 잘하는데 노래도 잘하네? 지금처럼 유튜브도 없고, '소리바다'로 그의 노래를 찾아 들었다. Rock의 기타소리를 좋아하고 허스키 보이스를 좋아하던 나는 그의 두번째 앨범의 첫 노래가 좋았다. 신해철의 '50년 후의 내 모습'을 리메이크 한 노래였다. 그 전에는 신해철을 알았겠지만, 잘 알지 못했다. 그를 통해 알았다. 신해철의 노래는 알고 있었겠지만 홍경민의 노래를 통해 그를 더 알려고 하고 좋아했을지도. 홍경민은 락커였으니까.


그때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를 처음 가졌었다. 늘어질 정도로 듣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지는 못한다. 얼마나 들어야 필름이 늘어질까. 나도 열심히 들었는데...마이마이가 없었으니 집에와서 듣고, 시골 갈 때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챙겨가서 듣고, 네 식구가 시골 먼 길을 떠나는데, 도로 위 우리집 쏘나타 안은 홍경민 노래로 가득찼었다.

1집도 찾아 들었다. 음반은 구하질 못했다. 소리바다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앨범의 타이틀보다 그가 가사를 쓰고, 그가 곡을 지은 것들이 더 좋았다. 1집의 '그대, 푸른 바다를 사랑하는가' 2집의 '그대, 푸른 하늘을 사랑하는가'는 지겹도록 들었다. 플레이어의 되감기 버튼이 그렇게도 느렸었다. 지금이면 못 참았겠지.

그렇게도 열심히 듣고 형의 3집을 기다렸다. 나는 지금도 서태지를 문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만, 락을 하던 그가 변절했다고, 그 판도 느끼고 팬들도 느꼈을까.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지만, 그때 임재범이 '이밤이 지나면'을 부르고 나서부터, 락 보컬들이 발라드로 접어든지 수년이 되었을 때였다. 이현도의 노래냐, 아니 이제부터는 유영진의 노래다가 판을 칠 때였다.

홍경민, 우리형의 3집이 나왔다. 앞 뒤 젤 것도 없던, 노래의 정보도 접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레코드 가게를 가서 4900원의 테이프를 사던가, 9900원의 CD를 사야 할 시절이었다. 데뷔 방송도 보기 전에 CD부터 샀다.

98년 월드컵은 브라질의 호나우도와 프랑스의 지단의 싸움이었다.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던 사내는 리키마틴뿐이었다. 그의 노래는 마카레나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작곡가 김창환은 뛰어났다. 박미경을 키워냈고, 김건모를 키워냈다. 그리고 클론을 성공시켰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한테만은. 홍경민까지 성공시켰다. 1,2집의 홍경민을 좋아했던 나는 신나서 레코드가게에서 그의 3집 CD를 사서 들고 집에 와, 그의 CD를 밀어 넣자마자 실망했다.

신해철을 좋아한다던 락커는 사라졌다. 발라드로 타협했다더니, CD를 산 다음 날 방송에서 그는 말도 안되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앨범을 사려고 열심히 아버지의 구두를 닦고, 심부름을 한 보람이 사라졌다. 이럴려고...500원짜릴 모았나 싶었다. 그를 설득 한 김창환이 너무도 싫었다. 가요계가 이수만 판이 되는구나, 돈이면 다 되는구나. 그 시절 가요 방송에서 립싱크는 자연스러웠다. 너무도 싫었다. 그래도 오른손 왼손을 허우적되며 LIVE로 부르는 그를 보는 것에 만족했다.

오디오가 생겼는데 카세트 플레이어로 그의 2집을 더 들었다. 어린 나이에 우리 형이 타협했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타협이 쉬웠을까. 키워주겠다는데. 그때 타협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묻혔을텐데. 4집도 샀다. 그대로 였지만, 그래도 선배 노래 한곡은 리메이크 했다.

지금도 느끼지만, 나는 10년, 20년 전에 태어났어야 했나보다.

우리형이 앨범을 또 냈다. 또 샀다. 좋네? 근데 왜 곡 안 써? 이 느낌이었다. 그가 쓴 곡이 좋았는데...돈을 주고 산 마지막 앨범이었다.

또 프로듀서가 김창환이네.

자야겠다. 암튼 그렇다. 오른손 왼손 허우적 되더니, 그 판에서는 흔하지 않은 군대 잘 다녀온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눈에 확 띄였지만, 지금은 그냥 그런 저런 가수가 돼버렸다. 그래도 나는 좋다.

'itv' 경인방송이었던가. 촌스럽던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 데뷔 방송도 보았고, 1집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박기영의 2집 복귀 무대도 보았었다. 박기영 테이프만 샀다. 그 앨범 속 노래 '시작'은...음, 누군가한테 불러줬었던,,, 그때는 좋았었지. 그때 빼고,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보다 더 오래전 가족들이 다 자는 안방 이불 맡에서 조용히 12시에 tv를 틀어 이소라 누나의 프로포즈를 봤던 그때가 그립다. 그 후로, 카세트 플레이어를 107.7메가 헤르츠로 맟추고 12시가 되면 정지영 누나의 달콤한 목소리를 두시간 동안 들었던 그때가 그립다, 그러고도 잠이 못 들어, 걸걸했던 고스트 마왕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때가 너무도 그립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나는 교과서가 배개인 마냥 창가 쪽 제일 뒷자리에서 자거나,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었다.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래서 더 그립다. 잘란다. 노래 못 부르고 자서 더 그 시절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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