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 5장 포기와 자유
이 감상문은 @peterchung 님의 추천으로 시작 되었으며 @nabinabi 님의 지목으로 제 5장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럼 처음 보시는 스팀잇 동지들을 위해서 바가바드기타 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자면 인도의 영원한 정식적 지침서이자, 힌두교 최고의 성전입니다. 마부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와 판다바족의 왕자 아르주나의 대화가 주 내용이며,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마하바라타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왕권과 골육상잔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아르주나에게 크리슈타는 다르마(의무)의 개념을 가르칩니다. 더불어 카르마(행동), 즈나나(지식) 박티(신애)등 신(神)에 이르는 여러 길을 제시하며 그 우주적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이야기나 등장 인물로 따지자면 삼국지에 비할바는 못 됩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대화로 인도의 정신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수가 있는 내용등을 담고 있어 우리가 삶에 느낄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읽은 번역본은 정창영 역의 [바가바드기타] 입니다. 지극한 개털의주관적 의견이니 혼동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싯타르타 - 이미지 출처 : 구글
제 5장 포기와 자유
제5장에 나오는 주된 대화의 내용은 아르주나의 질문인 "세속적인 행위를 포기하는 ‘상키야 요가’ 수행 방법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카르마 요가’ 수행 방법중 어떤것이 더 좋은 길이냐? "가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즉, 수행을 함에 있어 브라만, 승려, 수도승등과 같이 세속적인 행위를 포기하고 오로지 수행자의 길을 가는것이 좋으냐? 아니면 세속적인 세상에 살면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좋으냐? 정도의 뜻으로 이해 됩니다.
Lord_krishna_and_Arjuna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때 크리슈나의 답변을 보면 ‘상키야’ 방법이나 ‘카르마’ 방법 둘다 지고한 목표에 이르게 한다고 답변을 합니다. 마치 산에 올라감에 있어서의 길은 하나가 아니듯 또 부산에서 서울을 감에 있어 걸어가는 방법도 있고, 차를 타고 가는 방법도, 기차를 타는 방법등 길은 여러가지나 이 두가지 방법 모두는 서울에 가고자하는 목표만 있다면 지고한 목표(힌두교 신자에겐 아트만을 보게 되며,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불교 신자는 참자아를 만나게 되는…) 에 다달을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만날수 있느냐? 각각의 모든 이들에게는 아트만, 하나님, 참자아 가 있는데 그것은 어둠(무명) 혹은 더러움(욕심)으로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9홉개의 문 즉,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입, 항문, 생식기로 부터 오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으면 그 지고한 목표에 다다른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행위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봉사를(보시, 헌금등도 포함) 하며 마음속으로 내가 이것을 하면 복 받을거라는 마음, 너는 가난하고 불쌍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가여이 여겨 떡 하나 준다는 마음등이 없어진 없어진 행위. 그냥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냄새맡고, 자고, 싸고 하면서도 이것은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나 반응 한다고 알고 그저 행해야 될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개털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내가 오늘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경지는 그렇게 되어져야 되는것이지 마음을 먹고 생각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 입니다. 왜냐하면 무슨일을 하면 자랑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또는 좋은건 좋고 안좋은것에 반응을 하는것은 우리 사람의 몸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五根)
Jesus - 이미지 출처 : 구글
예수님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건 그냥 그렇게 들었으므로 그런게 좋다는 것을 아는것이지 누구나 진정으로 그러한 경지에 바로 오를수 있는게 아닙니다. 설사 내가 지금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해도 오른손이 100억을 기부하게 되면 왼손에게 알리고 싶은게 사람의 일반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 마음 그 상태 그대로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이런 예수님의 마음 상태는 어떻게 만들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수행을 통해서 이뤄질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수행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 수행은 수사들의 명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힌두의 경전을 읊으며 찬탄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방법, 기독교의 기도로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 불교의 호흡 또는 화두 그리고 염불 명상법 또는 다른 이를 돕는 봉사활동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바른 수행의 방법은 차치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길을 가야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진정한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건 행복도 괴로움도 없는 있는 그대로를 아는 삶인데 우리는 욕망과 분노 속에서 매일 죽겠다 죽겠다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화내며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며 지금 살고 있는 내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게(물론 잠깐씩 잠깐씩 행복하지만…) 보통의 우리의 모습니다.(대표적으로 한진의 이명희가 예시를 보여주고 있슴)
이것을 내가 알아차려 욕심으로 자만감으로 내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이것은 잠깐 동안 지속이 되는 육체적 기쁨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삶을 살게 된다면 누구를 죽일 이유도 사기를 칠 이유도 도망을 다닐 이유도 없이 온전하게 내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온전한 내 삶을 살수 있으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바로 헉헉거리며 다람쥐 챗바퀴를 돌리고 있는 바퀴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의로서의 삶을 살아 갈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인이란 두려움도 욕망도 즐거움도 고통도 그냥 다 "아! 내가 지금 그러한 상태이구나" 하고 그때 그때마다 알아차리는 그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되었을때 고통은 그냥 저기 있을뿐이지 내 안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아르주나 질문에 대한크리슈나의 답변은 두가지 다 진리에 이를수 있는 방법이며 여기엔 내가 행하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당신이 원하는 아트만을 만나게 될것이라는 가르침을 일러줍니다. 종교를 떠나 인도의 사색과 철학의 깊이는 저 시절에도 정말 어마어마한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이 경전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느낄수가 있습니다. 이런 깨우침에서의 밑바탕에서 부처도 설법을 할수 있었을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관심이 있으신분들은 한번 읽어보시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다음 수행에 대한 얘기와 수행을 지속 했을때 내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바뀌어 나가는지는 @nabinabi 님께서 계속 연재하실겁니다.^^ 덕분에 좋은 사색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