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u essay]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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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이들에게 가급적 숙제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수업 시간 속에서 불성실하거나, 일과 시간에 설렁설렁 해서 과제를 마치지 못한 경우, 다음 수업에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과제를 주지 않는다. 4학년이지만 벌써 아이들은 여러 개의 학원을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학원마다 내준 숙제를 하느라 하루의 많은 시간을 써버리기 때문이다.

 점심 먹고 학교에서 돌아와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해질 때까지 그저 놀기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아이들이 그때를 모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학교 숙제 하나 없다고 아이들의 생활이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일상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줬다는 기분을 느끼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일기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쓰도록 한다. 기본 두 번에, 그 이상을 쓰면 보상을 준다. 그리고 주말엔 주제를 주고 주제 일기를 쓰게 한다. 매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또 뭘 쓸지를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주제를 던져주면 아이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어차피 써야 할 일기이기 때문이다.

 3월 초부터 매주 주제 일기를 줬으니, 아이들은 꽤 많은 주제 글을 쓴 셈이다. 처음엔 주말에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소감 쓰기, 주말에 먹은 음식에 대해서 쓰기, 부모님 안마해드리고 소감 쓰기 등 일상의 소재를 제시했다. 아이들은 주말에 미션을 완수하고, 소감을 적어왔다. 그러다가 점점 추상적인 주제를 주기 시작했다.

 얼핏 생각하면, 4학년 수준에 추상적인 주제를 주면 글쓰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들 것이다. 나도 처음에 반신반의하며 그런 주제를 줬고, 아이들이 어떻게 써올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어른 중심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아이들은 추상적 주제를 자신의 수준에서 이해한 개념으로 풀어 글을 써왔다. 쉽게 말하면, 저 마음대로 써왔다는 말이다. 행복, 기쁨, 슬픔 등의 단어는 아이들의 생각을 거치면서 재정의 되곤 했다. 23명 아이들의 행복과 슬픔의 개념 자체가 저마다 달랐던 것이다.

 주말이 지나면 일기장 보는 재미가 있었다. 틀이 없는 사고, 개념 없는 인식을 가진 아이들은 주제들에 대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그 ‘아무 말 대잔치’는 나를 흡족하게 했다.

 자료를 정리하다가 모아둔 주제 글을 보게 되었다. 그 주제 글은 아이들의 일기장에서 꺼내어 미술 시간에 그림을 곁들여 꾸며보기도 했다. 주제는,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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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많은 아이들이 평화와 가족을 연결했고, ‘존중’과 ‘배려’ 같은 덕목을 언급했다. 하지만 걔 중에는 평화의 개념이 남다른 아이들도 있었다.

 지난 번 글에서 언급했던 수민이의 평화에 대한 생각은 놀라움을 안겨줬다.

꽁꽁 얼어버린 마음이지만 침묵한다. 단단한 얼음 속은 꺼낼 수 없듯이 마음도 꺼낼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비밀’에서 온다. 꽁꽁 숨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조용하고 차갑지만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4학년 맞다. 내가 손 본 거 아니다. 그 아이가 쓴 그대로다. 수민이가 왜 이렇게 평화를 정의했는지 짐작이 간다. 수민이는 말을 하거나, 감정을 표출했을 때 주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차라리 생각을 비밀로 봉인하는 것이 평화롭다고 느낀 것 같다.

 아이다운 글도 있다.

평화는 음식에서 온다. 왜냐하면 음식은 먹을 땐 기분도 좋고, 입이 심심하거나 허기질 때도 음식을 먹어서 좋기 때문이다.

평화는 엄마가 입을 다물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입을 여는 순간, 칭찬이나 잔소리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70%, 칭찬은 30%이다. 칭찬 받을 일을 더 해야 한다.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말도 있다.

나에게 평화는 곧 올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오고,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지 않는다.

 아주 현실적인 평화를 기대하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만약 국회의원인데, 시끌벅적한 도시에 공원을 몇 개 지으면 평화가 올 수 있다.

가족과 신나게 놀고 웃고 하면 평화가 온다.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하고 놀면 평화가 온다.

평화는 가족에서 온다. 가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가족은 싸움을 무조건 1번은 한다. 그때 화해하면 평화가 온다.

나의 평화는 우리 가족에게 온다. 우리 부모님께서 매일 학원, 학교를 다녀오면 나에게 평화 같은 얼굴로 반겨주시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 언니 정말 고맙다. 정말 집에 오면 평화가 오는 것 같다.

부모님께서 칭찬해 주시고, 사랑해주실 때 평화가 온다. 우리 가족은 평화가 많이 오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인 믿음이 드러나는 아이도 있다.

평화는 하나님에게 온다고 생각해요. 성경에 이야기들은 희망과 교훈을 담고 있어요. 이 교훈들을 잘 따르면 평화가 오고,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평화를 한반도의 정세와 연결 짓는 아이도 있다.

평화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다. 전쟁이 나는 것도 평화를 생각 안 해서 그렇고, 통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그런 것 같다.

 평화에 대해 나름대로 성찰한 결과를 적은 아이도 있다.

평화는 집 밖에서 올까, 아니면 집 안에 있을까. 평화는 저 멀리 우주에서 오는 건가. 어딘지는 몰라도 우리 곁에 있다. 나쁜 말이 나오면 그 평화는 깨진다. 하지만 평화는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여유를 줄 것이다.

평화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면 그 평화가 깨지는 곳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으론 평화가 깨지는 이유는 욕심, 차별, 고집, 거짓말 등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럼 이것들을 거꾸로 생각하면 욕심→배려, 차별→평등, 무시→존중, 고집→융통성, 거짓말→진실로 바뀔 때 평화가 온다.

 난 아이들이 제 멋대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이런 글을 사랑한다. 추상적인 주제는 아이들의 ‘아무 말’ 내지 ‘자기만의 생각’을 이끌어 내는데 더 효과적이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유

 학교에선 모든 교과를 가르치지만, 선생님의 강점에 따라서 치중하는 활동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교육은 교사를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미술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아이들과 미술 활동을 많이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노래를 많이 부른다. 그 반 아이들은 더 전문화된 수준 높은 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은 것이다. 난 글쓰기를 좋아하는 교사라, 아이들과 글쓰기를 많이 한다. 한 해 동안 꾸준히 해온 두 가지 활동이 글쓰기와 토론이다. (토론 교육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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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세기가 지나도 ‘글쓰기’와 ‘토론’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치가와 웅변가들에게 필수적인 학문이었던 수사학이 로마 몰락 이후 ‘말’에서 ‘글’로 적용되어 오늘에 이른 것처럼, 말과 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학습 활동이다.

 내가 어릴 때 이런 걸 못 배우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집착하게 된 억울함을 풀 요량으로, 난 오늘도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시키고, 토론을 가르친다. 오늘도 하늘에 불꽃이 터진다. 우리 반의 ‘아무 말 대잔치’를 위한 축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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