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최악의 마케팅이 망쳐버린 임창정의 역작, <스카우트>


#01 들어가며


  오늘은 홍보팀의 마케팅 덕분에 묻혀버린 수작, <스카우트>를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야구를 모티프로 한 한국영화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지만, 누적동원관객 수가 31만 명에 그쳤을 정도로 흥행에서는 참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스카우트>를 본 이후로 잊히지 않았던 여운을 혼자서만 간직하기 아쉬워 늘 주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봤다는 사람은 끝내 만나보지 못했지요. 

  누군가의 추천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 비운의 역작!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가 겪었던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는 분들에게 자신 있게 권합니다.   

#02 줄거리



  1980년, 서울 Y대학 야구부는 라이벌 K대학 야구부와의 교류전에서 3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를 결코 묵과할 수 없었던 Y대학은 광주일고 3학년 선동렬을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한 때 잘나가는 투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던 야구부 직원 호창(임창정)은 '선동열을 반드시 영입하라'는 특명을 받고 광주행 기차를 탄다.



  그러나 이미 K대학과 협상을 진행중이었던 선동렬은 K대학의 보호 아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선동렬을 쫓던 호창은 우연히  7년 전 헤어졌던 연인 세영(엄지원)과 재회하게 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창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홀연히 사라졌던 세영은 갑자기 나타난 호창의 모습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호창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세영을 짝사랑 하던 광주 지역의 건달 곤태(박철민)는 끊임없이 호창을 견제하며 세영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호창은 선동렬의 부모를 만나게 되었고, 끈질긴 설득 끝에 선동렬과의 계약을 눈 앞에 두게 된다. 호창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 날은 5월 18일. 광주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세영을 비롯한 광주시민들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세영과 호창의 이별에 숨겨져있던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데...

 

#03 홍보팀의 삽질



  2007년 개봉작 <스카우트>에서는 불멸의 엔터테이너 임창정과 배우 엄지원이 주연을 맡았고, 김현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열혈팬으로 알려진 김현석 감독은 <스카우트> 외에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YMCA 야구단> 등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제작한 바 있습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흥행에 실패한 영화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중성과 탄탄한 연출력, 뛰어난 심리묘사능력을 갖춘 김현석 감독에게 있어 <스카우트>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영화였을 겁니다.  


  임창정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잘 드러난 홍보 포스터만 보면, <스카우트>는 영락없는 임창정 표 코미디 영화입니다. '괴물투수 찾아 9박 10일'이라는 홍보문구는 더욱 가관입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머니볼> 류의 정통 야구영화가 나오는 것인가! 야구팬들을 잔뜩 기대하게 했습니다. 개봉 전 <스카우트>의 홍보팀은 프로야구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의 흥행을 이끌어보려 무진장 애썼습니다. 극 중 호창이 애타게 찾아해메던 "선동렬"을 마케팅의 최전선에 내세웠습니다.


  이는 홍보팀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선동렬"이라는 이름 석 자만 믿고서 <스카우트>행 티켓을 끊었던 야구팬이자 영화광인 저와 같은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구인의 애환과 임창정 표 코미디의 결합을 기대하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은 <스카우트>에 깔린 무거운 주제의식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을 겁니다. 관객들의 불편함과 배신감은 고스란히 흥행 성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차라리 좀 더 솔직하게 <스카우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영화인지를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결과는 분명 달랐을 겁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제4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스카우트>는 시나리오상을, 임창정은 최우수연기상을 받았습니다. 부일영화제에서는 각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5.18 관련 행사에서 종종 추모영화로 초청 상영될만큼 작품성만큼은 탁월한 영화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개봉했더라면 300만 정도의 관객은 족히 동원할 수 있었을 겁니다. 홍보팀의 과욕이 부른 흥행 대참사였지요.


#04 <화려한 휴가>와 <스카우트>, 그리고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2007년 5월 18일 개봉)>는 5월 광주의 아픔을 다룬 또 다른 수작입니다. 두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였으나, 5월 광주의 묘사방식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화려한 휴가>는 5월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며 관객들의 공분을 자아냅니다. <화려한 휴가>를 시종일관 관통하고 있는 감정은 바로 '분노'입니다. 괴물이 되어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권력이 다수의 시민을 어떻게 해칠 수 있는지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스카우트>에서는 국가적 폭력이 어떻게 개인에게 각인되며, 그 각인된 기억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뒤틀어놓을 수 있는지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국가 폭력의 잔혹함은 주제의식을 적당히 드러낼 수 있는 선에서만 간접적으로 묘사될 뿐, 관객들의 공분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시대의 잔혹함이 남긴 상처로 어긋나버린 인연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시종일관 느꼈을 감정은 바로 '슬픔'이었을 겁니다. 


<화려한 휴가>에서 느꼈던 분노는 강렬하게 타올랐다가 어느새 잊혔지만, <스카우트>에서 느꼈던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한켠에 더욱 저릿하게 자리 잡으며 잊지 못할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한국의 시대상이 뒤틀어놓은 개인의 삶을 미시적인 관점에서 묘사했다는 점에서 <스카우트>는 한국영화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박하사탕(1999년 개봉)>과 비교해볼 만 합니다. 시대의 아픔이 개인에게 남긴 상처, 그리고 시간의 불가역성이 주는 짙은 슬픔과 후회는 <스카우트>와 <박하사탕>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입니다. 


  다만, <스카우트>는 5월의 광주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영화의 분위기가 마냥 가라앉도록 놔두지 않는 임창정-박철민표 유머가 곳곳에 숨어있다는 점에서 <박하사탕>과는 코드가 약간 다릅니다. <박하사탕>은 한국 근현대사를 여러 단면으로 잘라 꺼내어보이며, 그 속에서 파괴되어가는 한 개인의 삶을 시종일관 진지하게 묘사합니다.  <박하사탕>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스카우트>의 그것보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감을 갖습니다. <박하사탕>을 감상하려면 약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05 나오며


  <스카우트>에서 배우 임창정은 말 그대로 '인생연기'를 보여줍니다. 흔히들 임창정을 코믹 배우(TV로 보면 코믹하지만,  스크린으로 보면 왠지 모르게 재미가 없는)로 알고 있고 저 또한 그런 줄로만 알았으나, <스카우트>의 임창정은 밀려드는 후회와 반성, 애절한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했던 '진짜 배우'였습니다. <스카우트>를 보고 나서는 한동안 임창정의 웃는 얼굴만 봐도 가슴 한 구석이 찡할 정도였으니까요. 늘 아쉬운 작품 선택으로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임창정이었지만, 이번엔 진짜라고요! 


  탁월한 작품성을 갖추었음에도 흥행에 실패하고 잊혀진 비운의  역작 <스카우트>.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스카우트>는 빌리 빈의 고뇌를 다루거나 선동렬 스카우트의 비화를 다룬 야구영화가 아닙니다. 형편없는 타이틀과 포스터에 부디 속지마시길.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