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세이] 데미안을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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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는 당신의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어떤 꿈에 대해서도 거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흠잡을 곳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면 당신 곁을 떠나버릴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버리고 자기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찾아갈 겁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처음 데미안을 읽었다. 손바닥만한 마당문고 시리즈가 줄지어 있는 동네서점에서 제목이 근사해서 뽑기를 하듯 집은 책이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앞면이 닳아서 찢어질 때까지 읽을 책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불운한 계절들을 힘겹게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보름이 지났을 즈음 반장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담임은 깡마르고 발음이 엉망인 영어선생님이었는데, 매사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차라리 무서운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잘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기분이 좋다가도 마음이 안드는 구석이 보이면 악담을 퍼붓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눈썹뼈 위에 튀어나온 피부부터 위로 쏠렸는데, 나는 항상 그 부위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분때문에 내 어깨는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런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환경미화전을 위해 학급비를 모았는데, 나는 그 날 오전에 거둔 학급비를 점심시간에 몽땅 도둑맞아버렸던 것이다. 공포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5만원 정도 되는 돈이었는데,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실직상태라 집안형편이 어려웠으므로 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5만원만 구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이틀밤을 꼬박 샌 나는 교무실에 찾아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묵묵히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차가운 말투로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맞을 각오를 하고 갔으므로 나는 이 정도에서 끝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진짜 벌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그 날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 대하듯이. 조례나 종례, 혹은 교무실에서 그가 나에게 말할 때는 언제나 시선을 내리깔고 교무수첩을 보며 말했다. 그 때부터 악몽에 시달렸다. 어린 싱클레어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려도 다른 학과목 선생님이 나에 대한 칭찬을 해도 담임선생님은 영원히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죽도록 미웠다. 동시에 한없이 강해지고 싶었다.

"네가 그 녀석을 두려워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너도 알지, 그렇지 않아? 두려움이 우리를 망치게 하는 거야. 하루빨리 벗어나야해. 네가 진짜 사나이가 되려면 그 두려움을 벗어던져 내야 해. 알겠지?"


  얼마나 싱클레어에게 이입했는지 소설 속의 데미안이 꿈속에 등장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시절 사춘기 소녀였으므로 진짜 사나이같은 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더 책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린 싱클레어,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겠지. 크로머나 그 밖의 때문에 말이야. 그땐 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쉽게 말이나 기차를 타고 갈 수 없을 거야. 그럴 때 너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될거야."


  데미안의 말대로 나는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언어의 형태가 아닌 어떤 의식을 느끼곤 했는데, 그는 나에게 '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불에 데인듯이 놀랐다. 불행의 정중앙에 있는 나에게 그 메세지는 너무나 사악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두려워하고 있기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물론 마당문고판 데미안은 사라진지 오래고 언젠가 읽으려고 사두었던 초판표지를 그대로 살린 하드커버를 펼쳤다. 그날 데미안을 다시 읽고나니 갑자기 캔들명상을 하고싶었다. 방의 불을 끄고 캔들에 불을 밝힌 후 불꽃 안의 가장 어두운 심지를 보며 포커스하고 있는데, 문득 온몸을 휩싸는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불운한 시절의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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