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는 가난함 속에 피어난 나의 삶과 사상


안녕하세요 margin short 입니다 ㅎㅎ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직전 글을 한번 더 읽다 생각이 나서 써봅니다. 전 종이매체에 글싣기를 하는동안 제 이야기를 꺼내본 적도 없고 제 학문적 입장에 대해 이렇다할 설명을 해본적도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자잘한 개인사를 적는 자리도 아니었구요. 근데 여기선 그냥 다들 본인 이야기도 꺼내보고 하시길래 제 글들과 관련되있기도 하고 저도 개인적으로 절 모르는 사람한테 속털어놓고 싶기도 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전 이전 글에도 얘기했듯 개인적인 내용을 글에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글에 편견이 끼게되는 이유를 들었었는데 그거말고도 몇가지 이유는 더 있습니다. 제 삶의 못난 면이 부각되면 글을 열심히써도 못나다는 평을 듣고, 잘난 면이 부각되면 적당히 써도 더 멋지다는 평을 받더군요. 제 학창시절 친구들은 지금 절 만나면 정말 동고동락한 몇을 제외하곤 모두 '말도 안돼' 라는 눈빛으로보고, 대학 이후로 만난 사람들은 절 만날때마다 '역시' 라는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어떤 시각의 차이가 있는지 알아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들이 있음에도 조금만 저도 터놓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전 글들에도 꾸준하게 주장해왔듯 전 자유주의경제 , 고전학파적인 시각을 매우 진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가끔 글에 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서술하기도 합니다. 이 두가지 키워드는 제게있어선 서로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제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제 삶의 일부를 꺼내 보여드리려 합니다.


저희 집안은 현재는 뭐 나쁘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다는 말은 다같이 모이고 싶을때 모일 수 있고 모였으면 짜장면말고도 다른 메뉴를 시킬 수 있는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냥 보통의 평범한 집안입니다.

제가 고교 중반부가 넘어가던 시절, 경제에 관심갖게된 즈음부터 아마 이렇게 편해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엔 제목에 적혀있듯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장난감은 새것을 가진 기억이 친척이 사다주는 것 외엔 없었고, 애들 다사모으는 200원짜리 딱지, 학종이도 사달라는 말을 못해 친한 친구에게 하나 빌려서 겨우 따서 갚는 식으로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그떄 100원짜리 오락기도 유행이었는데 철권같은걸 하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부럽게 바라보며, 하루는 집 곳곳에 있는 10원짜리를 잔뜩 모아갔다가 문방구 아저씨께서 망신만 엄청 주셔서 울면서 집에 온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름도 모르는 형들과 애들이 망신당하는 절 보면서 다함께 낄낄 웃던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부모님은 보통 집에 안계셨고 동생과 조그만 병아리니 햄스터니 작은 애완동물만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물론 저희 형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도롯가 매대에서 데려온 병약한 아이들이라 쉽게 이별을 해야했고 그냥 그렇게 점점 무덤덤히 이별을 겪어가며 일부 차가운 시각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조그만 아이들과 함께 밤 12시가 넘도록 오시지 않는 부모님을 어린 형제는 끝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저희가 야행성을 가졌을지도 ..ㅋㅋ)

좀 머리가 커 중학교에 진학한 뒤 돈이 없으니 교복이야 그렇다 쳐도 '인정받는' 신발과 가방, 핸드폰을 갖지 못했고 하필이면 초, 중학교가 부유한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라 항상 기가죽어 다녔습니다. 풀이 풀썩 죽어서는 학교에 가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시간을 보내며 잠만퍼자니 시비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겐 당연히 표적이 되었고 그게 싫어서 더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곤 집에와서 어머니가 품앗이로 얻어온 모기 시체가 묻은 낡은 중고책을 보며, 그안의 수많은 용사들과 위인들을 만나며, 동생과 역할극도 하고 그때당시 보급되기 시작하던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접하기도 하며... 내면의 억눌린 감정들을 표출했습니다. 그야말로 '방구석 여포'가 되었죠. 매일 등교부터 하교사이의 시간은 제게 '무색무취'의 시간이었습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습니다. 일부러 먼곳을 골라 지원했습니다. 집안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와중에 내 이전을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가서 인생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에서요. 정말 쌩 양아치 고등학교 + 흔히 달동네라고 불리우는 반지하촌에 사는 친구들이 바글바글 몰리는 학교였습니다. 그 속에선 별것 없는 저도 부유층이 갖는 자신감을 갖게 되더군요. 그렇게 제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이 왔습니다. 거긴 적응도 쉬웠고 빤빤하게 줄인 교복과 슬리퍼한짝만 대강 질질 끌고다녀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냥 별거없이 어울리고 별거없이 말해도 웃고 떠들고 놀고, 이때 제 이전 글인 '100명중 1명이라도' 글의 그 친구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 학문적 스탠스를 취할때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준 친구를 한명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정말로 비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사는 제 가정사가 아니기에 밝힐 수 없지만, 단적인 예로 보여드리자면 양념갈비란 것을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어서 제가 시커멓게 양념된 갈비를 사다줬더니 조리방법을 몰라 그냥 계란처럼 생각하고 라면에 넣어버려 결국 다 못먹게만든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래도 저와 죽이 잘맞아 학창시절 내내 붙어다녔고 성인이 되서도 거의 몇안되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입니다.

학창시절을 보내고 전 한차례 더 도전끝에 나름대로 명문사학의 대학생이 되었고 이 친구는 어려운 형편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취업이라 해도 기술이 없는 친구에겐 배달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고교시절부터 경제에 관심이 많아졌던 저는 처음에 많은 젊은 경제학도가 그렇듯 홍길동의 역할을 해준다는 복지정책에 이끌렸습니다. 아마 가난을 겪어 더 비 이성적으로 몰입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는 밤 12시가 넘도록 부모님을 기다리는 불쌍한 형제로 돌아가기 싫어서요.

근데 제가 복지정책을 찬미하는 말을 달고 살던 새내기때 그 친구는 처음으로 제게 뜬구름잡는다고 했습니다. 저렇게 젊잔은 표현이 아니라 한마디로 "足까는 소리 하지 좀 말아라" 는 거였습니다. 너가 말하는 그것들을 왜 그럼 자기가 이 나이먹도록 받지 못하냐는 거였습니다. 그땐 제가 배운 이 좋은 제도들이 모욕당한 다는 생각에 "좀만 있어봐라 복지를 실행에 옮겨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날테고 그리고나면 내가 무슨얘길 하는지 너도 이해를 할거야" 라고 답하고 말았습니다. 당장 하루 일 못하면 없는 돈 긁어모아야 할 스트레스에 손을 벌벌떠는 친구한테 내 과거의 가난은 생각도 안한체 학문적 자존심에만 매달려 '좀 기다려보라'고 한것이죠.

그리곤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복지정책들이 공약됬고 시행됬지만 그친구의 집안이 수혜받는 혜택은 몇년이 지나도 고교시절과 같이 그냥 계속해서 기초수급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친구는 이미 배달일을 하고 있었기에 소득수준이 수혜기준을 넘어서, 일을 쉬고계신 아버지만 그걸 받고 있었구요. 요즘과 비슷한 반 무상복지형태의 복지도 많이 나왔지만 대학을 다니지 않는 두 성인 남자 형제와 연로한 아버지까지 이 셋에게 해당되는 복지는 없었습니다. 그냥 기초수급생활자였습니다. 그때부터 전 자유시장경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복지와 포퓰리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게 시작했습니다.

복지는 극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퍼주는 그런 극단이 아니라 '극'빈부터 차곡차곡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복지정책은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의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비로소 '내가 경제학을 접하면서 그 친구에게 설파했던' 그야말로 '완벽한 복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보이지 않는 이면' 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평범한 가정이 무상복지로 받는 그깟 '20만원'이 아쉬워서 배달하다 다친걸 엑스레이 한번 찍지 않고 2천원짜리 파스한장으로 버티던 그 친구, 팅팅 불은 모습을 본 제가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했습니다. 배달 일당으로 모은 돈 다 어디갔냐니까 오토바이 기름값하고 휴대폰 요금, 반지하방 주택공과금, 생활비로 다 썼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수급비타시는 거 보태달란말 못해서 2만원짜리 엑스레이를 안찍었구요. 그 푼돈 20만원이 이 친구네로 더 오길 바랬습니다.

작년, 그 유명한 5일 연짱의 추석명절때 사장이 명절 휴가비라고 20만원 쥐어주면서 나오지 말랬대서 "너도 좀 푹 쉬고 술이나 한잔하러가자" 했더니 담배연기를 푸우 뿜어대면서 비는 알바자리나 좀 알아봐야 겠다고 했습니다. 5일간 비는 돈을 20만원으로 어떻게 메꾸냐는 겁니다. 그날 하루 퀵끝나고 오면 받아오는 돈으로 매일 3만원은 저금하고 나머지 십만원 조금 넘는 돈으로 생활하였으니까요. 하루 일이 무슨 이유에서든 없어지면 당장 그날이 막막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근로의 자유를 중요하다고 적었습니다.

올 초엔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보고 "니 저러면 지금 근로시간만으로 계산해도 대학나온애들보다 더벌겄다." 했더니 대답하는게 "안그래도 처음 일 시작한 이후로 매년 오백원 , 천원오를때마다 살얼음 판인데 만원되면 할줄아는건 조또없는 내가 안짤리겠냐" 라고 하더군요. 경제학을 접한적도 없는 친구가 저런 원리를 사회생활로, 몸으로 직접익혀 알고 있었습니다. 직장인들은 보통 최저시급보다는 높은 금액의 시급으로 계산된 월급을 받습니다. 최저시급 1만원을 외치는 알바생들도 대학생이 상당히 많죠. 근데 이 친구는 그냥 지금만 제발 유지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최저시급을 당장 그렇게 올려버리면 여행을 가기위해 돈을 모으는 친구들이 아닌 진짜 생계를 위해 짤리지 말아야하는 극빈층이 짤릴 걱정을 하고 짤리게 되면 더 낮은 시급을 받는 곳을 찾아다니며 구직을 구걸해야 합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이면을 알아주길 바랬습니다. 우리가 어떤 다양한 계층에 대한 복지를 논할때마다 전 항상 극빈을 떠올렸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함' 을 가져본 자들이 마음에 지고있는 상처하나씩과 지금도 형편이 나아지지못한 제 고교시절 친구들을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자유시장을 지지해도 복지의 필요성은 분명한데, 건드릴거면 진짜 극빈부터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 학파적 시각을 좀 벗어나서 '진짜' 도움받아야 할 사람들을 직시해야한다고 전 항상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요즘 모두가 힘든건 매한가지 입니다만.. 항상 더 나은 사람만을 보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특히나 내가 혜택받아야 하는 입장이된다면 더 낮은 곳을 한번 더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낮은 삶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고 있는, 밤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않는 부모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형제를 전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글의 초입에 적어둔 제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자 결론이고, 제 삶의 일부입니다.


글을 적다보니 저도 모르게 예전 생각들에 몰입해서 정말 끝도 보이지 않게 써내려갔습니다. 길이 너무 길어져 죄송스럽네요. 버스에서 내려 집에와서도 옷도 안갈아입고 지금껏 의자에 걸터앉아 작성했습니다. 아 조금 있다가 새로 준비하는 카테고리글도 올려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일단 장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서 장보고 잠시 다녀올겁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는 형제는 더이상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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