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주말농장을 찬양해라!'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수 년전 갖게 되었다.
'사조로서의 계몽주의'에 대한 접근 외에,
해당 사상가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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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갑자기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읽지 못하고,
책장 구석에 처박아 뒀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눈에 다시 띄게 되었는데,
마침 @vimva님의 포스팅을 보고 읽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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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어들고 보니 ‘논술’을 대비하기 위한 교재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이냐?

지배적인 이념이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사상들을 억압하는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

좋은 이야기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입에서 중요한 논술시험을 대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프랑스의 사상가로 불리는 볼테르가 쓴 것이다.
180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책이고
특별한 사상적 내용의 전개나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없으니
반나절이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줄거리는 너무도 단순하여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몇 줄로 줄인다.
캉디드라는 인물과 그 주변인들이 겪는 인생의 여정을 짧게 정리한 것이다.
낙천주의자로 성장한 캉디드가 구체제의 지배사상에 물들어 있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구한 고난을 겪은 끝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지역에 작은 땅을 장만하여
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신파조의 소설이다.


볼테르는 온갖 터무니없는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구체제적 사고와 자신의 철학적 경향과 상이한 사상가들을 비꼬고,
서로 고통을 주게 만들며, 비참한 결말을 맞도록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름대로 현실적인 세계관을 가질 것을 권장하는 듯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그 내면에는 편견과 계몽주의 사상의 태생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볼테르의 편견을 보면,

P54
“ … 유럽사람들의 핏줄에 우유가 흐른다면, ..주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핏줄에는 진한 황산이나..”
“ … 세계 곳곳으로 가는 프랑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그들이 우리를 도와 줄 겁니다..”

이런 편견은 신소설 '혈의누' '귀의성'등에서 느낄 수 있는 부류이다.

기구한 고난이 없었다면 현재의 달콤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예정조화론자’의 점잖은 자기정당화에 반대하여,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밭을 일구어야 한다”


멋진 말이다. 누군가 노동을 통해 농작물을 재배해야 한다.

볼테르는 팡글로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 데려다 놓은 것은 그곳을 경작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것은 곧 인간은 쉬려고 태어난 것이 아님을 입증하지.”
역사적으로 보면,
농노들은 이미 대대로 참혹한 환경에서 경작을 하고 있었다.
소설속의 주인공들만이 농노의 노동에 의한 과실을 대가 없이 소비하고 있었을 뿐이다.
볼테르가 살던 시기에 유럽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지배계급의 구성원 중 일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계급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그때 몰락한 낙오자들을 위해 처지를 비관하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정당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도적으로가 아닌 새로운 가치에 대한 인간정신의 각성이라는 모습으로..

봉건시대의 몰락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노동을 원죄의 대가가 아닌 진실한 삶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마치 술에 취한듯 중세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휘청거리다가
문득 깨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수많은 농노들이 들에서 진실되게 느껴지는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환상에 사로잡혀서 허튼 소리나 하면서 살아가는 귀족들에 비해,
멀찍이서 보이는 농노들의 노동하는 삶은 진실한 것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볼테르가 밭에 나가 삽질 한번이라도 해봤을까?
종교적인 미망에 사로잡힌 귀족과 사제들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후대에 남을만한 밝은 눈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그는 노동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단지 미화시켰을 뿐이다.

‘권태, 방탕, 궁핍‘ 에 대응하는 ‘농업노동의 숭고함’을 내세움으로써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가치관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체제를 질곡으로 몰아가는 지배계층이 사실을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진정한 삶은 농업에 있다는 결말은
그가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사회구조의 변혁이 아닌
지배이데올로기의 변화를 주장한 것이다.

그의 멋진 마무리 문구 역시 깊은 성찰에 의한 것이 아닌,
손쉬운 징벌적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위키피디아]


농업을 담당한 농노들의 삶속에서 행복과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길 바란 것인가?

그는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당시의 참혹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인정하고,
농업에 대해 단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길 원했을 뿐이다.

농업의 생산력이 극대화 된 21세기에서 조차,
‘소규모영농’의 현실은 보람이 아닌 생계를 위협하는 것인데.


물론 개인의 능력을 비교한다면,
현재의 사회체제 속에서 나 자 자신을 바라볼 때,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책의 내용에는 실망했으나,
@vimva님 덕에 읽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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