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의 가치 원천, '분산화'
블록체인의 가치는 '분산화'에서 나온다. 블록체인의 제 1가치라고 볼 수 있는 '보안성'은 결국 기록을 분산해 관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분산화의 장점은 역사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에서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네 군데의 사고에 분산·보관했고, 덕분에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의 참화로부터 실록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보편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실록과 같은 대량의 데이터를 분산·관리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런 작업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왕실 정도 밖에 없었다.
하지만, 블록체인은 이처럼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던 분산화 작업을 컴퓨팅 파워와 인터넷을 통해 비교적 저렴하게 구현했고(경우에 따라 여전히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를 다양한 분야에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블록체인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블록체인이 주목받고 있는 만큼, 이를 파훼하려는 시도 또한 얼마든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블록체인이 앞으로 계속 발전(혹은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가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분산화' 원칙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어떤 블록체인에서는 카르텔의 형성에 의해 '분산화' 원칙이 사실상 무너지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보면, 블록체인에 대한 위협은 외부보다는 오히려 내부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이미 널리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며, 카르텔에 의한 내부 집중으로부터 분산화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 또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진 않다.)
나는 블록체인에서 분산화 원칙을 유지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거버넌스(governance)의 변천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블록체인을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거버넌스의 정의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기에 앞서, 먼저 거버넌스의 개념부터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거버넌스라는 용어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그 뜻은 사용자에 따라, 문맥에 따라 쓰이는 의미가 천차만별이다. 솔직히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지경이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거버넌스의 의미는 아주 포괄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거버넌스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으로 나타나는 이유다. 거버넌스의 개념 정의가 카오스에 놓여있다는 것은 사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사전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어사전에서도 저마다 해석이 다 다르게 나타난다.
녹색창에 '거버넌스'를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위의 스크린샷에서도 알 수 있 듯 거버넌스에 대한 정의는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호도'하거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식으로 대충 정의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가장 적절하게 정리하고 있는 곳은 영문판 위키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문위키에서 정의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거버넌스는 '힘을 과시하거나(원시사회) 신의 권위를 빌려서(서구 중세사회), 혹은 자본으로 압도하거나(자본주의 시장) 투표를 통해(민주공화국가) 얻은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어떤 명령을 내리거나 의사를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개념을 최초로 들여온 학계의 오역과, 오역된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쓴 정치인들 덕분에 아직까지도 '지배구조' 또는 '000위원회' 등의 협의체 따위로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영역 또한 국내에서는 지자체나 국가로 한정하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거버넌스의 영역은 가정, 동아리, 회사, 시민단체, 정당, 국가, 국가간 연합체 등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면 모두 해당된다.
따라서 '거버넌스'는 어떤 구조나 조직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블록체인의 거버넌스는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노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으며, 여기서 올바른 방향이란 '분산화' 원칙을 지켜가는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채굴방식 & 거버넌스 수단, 'POW, POS, DPOS'
그렇다면 블록체인에서 공동체(노드)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POW, POS, DPOS 등의 '합의 알고리즘'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합의 알고리즘'은 블록체인을 구성하는 노드 중에서, 어떤 노드에 블록 생성 권한을 부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블록체인과 네트워크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흔히 '채굴'로 알려진 이 과정은 단순히 코인의 개수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며, 다분히 거버넌스적 요소를 담고 있다. 나는 어떤 공동체나 네트워크의 '거버넌스 형태'를 분석함에 있어, '권위의 발현 및 의사결정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이상의 합의 알고리즘은 모두 권위의 발현과 의사결정에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POW(작업증명) 알고리즘은 '운이 좋아야만 풀 수 있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모두에게 풀게하는 공평한 방식(?)을 통해, 정답을 맞춘 노드에게 한번의 블록 생성 권한을 부여한다. 이 때 블록을 생성한 노드에는 채굴 보상이 주어지며, 이는 경제적 유인으로 작용해 블록체인 유지에 필요한 노드와 컴퓨팅 파워 확보에 기여한다. 사실 이런 합의 방식에서는 어떠한 권위도 발생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블록의 생성 권한이 '랜덤'으로 부여되며, 게다가 이 권한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많은 채굴보상을 얻고자하는 채굴 노드 간의 경쟁이 일어났고, 이 중 일부는 문제를 한번이라도 더 때려맞출 수 있는 '힘(해시파워, 사례 : ASIC 채굴기)'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힘의 격차'에 의해 이론적으로는 발생할 수 없었던 '권위'가 나타나게 되었다. POW 알고리즘을 채택한 암호화폐에서 '채굴세력'의 입김에 따라 시장의 판세가 달라지는 것은, 이들이 가진 권위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POW 블록체인의 거버넌스에서 '분산화 원칙'은 어디까지나 권위를 획득한 채굴세력이 스스로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지켜질 뿐이다.
POS(지분증명) 알고리즘은 노드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의 양을 기준으로 블록생성 권한을 부여한다. 이 방식은 POW처럼 별도의 채굴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지분의 보유가 곧 '블록생성 기회'이기 때문에 경제적 유인이 분명하고, 따라서 네트워크 참여자를 확보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리고 더 많은 노드는 '분산화' 원칙을 더욱 더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려할만한 점도 존재한다. POS에서는 POW와는 달리 '권위'가 매우 명확하게 발생한다. 이 권위는 지분 보유량의 격차에 의해(빈부격차) 발생하며, 극단적인 경우 블록생성 기회를 특정 노드가 독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크 상황이 발생했을때, 분산화 원칙이 심하게 훼손될 우려가 있다. 다행인 것은 POS를 장악하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 할 것이라는 것과 '분산화'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권위를 가진 자들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POS 블록체인의 거버넌스에서 '분산화 원칙'은 권위를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해 유지 또는 강화 된다.
DPOS(위임된 지분증명) 알고리즘은 노드간의 투표를 통해 일종의 '상위 노드'를 선정하고, 이들에게 블록생성 권한을 모두 위임한다. 앞서 POS의 거버넌스에서는 권위를 획득한 노드가 시장원리에 따라 '분산화 원칙'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사실 리스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DPOS는 이런 리스크를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투표라는 익숙한 거버넌스 도구를 블록체인 거버넌스에 도입함으로써 '분산화'를 유동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위는 투표를 통해 생성되며, 이렇게 생성된 권위는 개별노드의 지지 철회를 통해 언제든 소멸될 수 있다. 따라서 선출된 상위 노드는 '분산화'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DPOS 블록체인의 거버넌스에서 '분산화 원칙'은 개별 노드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거스를 수 없는 수평적 거버넌스의 확산, 그리고 블록체인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블록체인의 거버넌스는 합의 알고리즘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현실세계의 거버넌스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실세계의 거버넌스는 공동체의 규모와 구조, 구성원의 특성 등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계속 변화를 거듭해왔다. 고대-중세에는 대체로 힘 또는 종교에 기초한 권위가 한 사람의 절대자에게 집중되었으며, 근대에는 소유권 개념의 탄생과 함께 주로 자본에 의해 권위가 형성되고 집중되었다. 현대에는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체'(forms of govenment)가 확산되었고, 투표를 통해 형성되는 권위는 여전히 집중되었지만, 적어도 삼권분립에 의한 상호견제를 받게 되었다.
나는 이 흐름이 POW-POS-DPOS로 이어지는 블록체인 거버넌스의 양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시파워의 격차에서 발생한 권위를 바탕으로 터프한 거버넌스가 이뤄지는 POW는 고대-중세의 권위주의적 거버넌스와 닮아있다. 또한 지분 보유 비중에 따라 강력한 권위가 발생하지만 자기 규제로 인해 보수적으로 거버넌스가 운영되는 POS는 이제 막 중상주의 시대를 지나온 근대의 거버넌스와 닮아있다. 그리고 지분 보유량에 따라 영향력은 달라지지만, 권위는 결국 투표에서의 득표 차에 의해 발생하는 DPOS는 지금의 자본민주주의 거버넌스와 닮아 있다.
확실히 이런 흐름이라면, 거스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블록체인 거버넌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이 또한 현실세계의 거버넌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자본민주주의 정체가 갖춰진 지도 벌써 100여년이 지났다. 큰 틀은 계속 유지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사실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변화의 근원은 경제성장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다. 특히 인터넷의 탄생은 권위를 가진 자들과 시민 사이에 존재하던 '정보 격차'를 크게 줄이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것은 100여년 간 기업과 국가를 지배해 온 '관료제'에 데미지를 조금씩 입히고 있다. 관료제는 훌륭한 거버넌스 보조 수단이지만, 시민의 덕성이 갖춰지고 계층간의 정보격차가 사라지면 작동하기 힘들다. 관료제는 공공선택론에서 말하는 ‘의사결정 비용이 높은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시민의 성숙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의사결정 비용을 계속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정체(foms of government)는 관료제라는 거버넌스 수단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주어진 권위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관료제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 시민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인공지능이 분석해 인사이트를 제공하며, 모든 정책은 스마트 컨트랙으로 자동으로 처리되는 세상이 온다면? 아마 관료제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존재하던 정체 역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피라미드와 같이 견고했던 수직적-중앙집중형 관료 조직은 점차 작은 단위로 쪼개지고 있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귄위가 무너지고 여성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으며, 기업에서는 전제군주와 같은 총수 1인에게 권한이 쏠리는게 아니라, CEO, CTO, CMO, COO, CPO, CKO, CSO 등으로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있다. 심지어 국가 정부에서도 지방자치단체로 권한을 나누는 분권 개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분산화'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수평적 거버넌스의 확산'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블록체인에서도 수평적 거버넌스의 확산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POS-DPOS는 현재로서는 '분산화 원칙'을 유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POS의 시장원리와 DPOS의 투표는 권위의 남용을 견제하는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권위가 끝없이 쪼개지고 분산되도록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다음의 블록체인 거버넌스는 분산화가 계속 진전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을 통해 구현될 지는 알 수 없다. 지금으로써는 그저 관심있게 지켜보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