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돌발성 난청이라는 증상으로 고생한지 2주일이 지났다. 외사촌 동생이 이비인후과 의사라 가서 진단을 받았고 약을 타왔다. 이비인후과 약은 독하다고 한다. 마치 아주 심한 몸살을 앓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주일째 집에서 움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동생이 처방해준 약은 날이 가면서 조금씩 줄어들게 되어 있었는데 토요일이 지나면 많이 줄어들게 되어 있었다.
약이 줄어들면 피곤도 좀 더 하리라 생각하고 한의사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에 한의원에 가서 침이나 한방 맞으러 가마하고 전화했다. 마음과는 달리 토요일 오전도 약기운으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오전 내내 마냥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오후나 되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차리고 나섰다.
내 귀속에는 여전히 삐하는 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이명은 잘 낫지 않는 다는데 앞으로 평생 친구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나섰다.
친구는 한의원 문을 이미 닫았고 우리는 성북동 어느 양고기집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친구는 돌발성 난청은 대부분 스트레스로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저런 처방을 한다. 내가 주로 책상물림이나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시간을 내서 땅을 흘리는 운동을 하란다. 그냥 걷는 것보다 간혹 땀을 뻘뻘 흘려야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미친놈 살면서 스트레스 없는 놈이 어디있어? 웃는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알고 있다. 그동안 몇가지 일로 몇년동안 고민을 했다. 이제는 모두 떠나보내야 할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힘들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나를 옧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음식을 보니 자꾸 당긴다. 먹다보니 배가 더 고팠다. 날 물끄러미 보던 친구는 나보고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타박한다. 아플 때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난 그동안 너무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걸어서 대학로로 갔다. 우리는 강북 세대이다. 요즘은 강남이 대세라고 하지만 난 여전히 강북이 좋다. 시간이 나면 난 강북으로 간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따라 사는 법이다. 우리에게 서울은 강북이었다. 광화문과 종로 그리고 대학로는 나의 젊음이 남아 이있는 곳이다. 고교시절 시간만 나면 우리는 종로와 광화문으로 진출했다. 나는 여전히 종로서적을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책사 볼 돈은 없고 책은 보고 싶고 하면 난 여지없이 종로서적에 갔다. 그 한 켠 구석바닥에서 카뮈와 싸르트르를 읽곤 했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은 내 젊음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친구가 대학로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는데 거기를 가보자고 한다. 지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적은 재미있는 곳이었다. 서점구경을 이리저리 하다가 책을 하나사고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만나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요즘 만나는 친구는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다. 친구라는 것은 수 십년 동안 부딪치고 살아 온 놈들이 최고 아닌가? 직장 동료들 그거 얼마 지나가면 모두 의미없는 것 같더라. 사람 좋기로 유명한 친구는 서울외곽에 있었는데 두말없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이미 저녁이 되었다. 근처 식당으로 들었다. 종로 5가 백제약국 뒤에 있는 백제식당이라는 곳이다. 육회가 유명하다고 한다. 친구는 술이 고팠고 나는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난 배가 고팠다. 갈비탕을 시켰다. 갈비탕에 밥을 한그릇 말아 다 먹었는데도 배는 여전히 허기졌다. 고기를 시켜 구으면서 여러 점을 먹었다. 한참을 먹었을까? 그제서야 허기가 멎었다. 병같지 않은 병치레를 하면서 힘이 들었나 보다. 한의사 친구는 몸이 않 좋을 때는 잘 먹어야 한다고 또 한마디 한다.
모이면 다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한다. 조금 지나면 항상 자식이야기로 넘어간다.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그동안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 친구가 말이 많아지면서 술도 빨리 취한 듯하다. 혀가 조금 꼬부라지더니 사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것도 무지하게 돌려서 이야기 한다. 해서는 안되는 말도 한다. 난 갑자기 겁이 났다.
누구에게든지 삶은 고단하다. 항상 유쾌하게 보이던 친구도 가슴 한쪽 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이면 우리는 항상 자식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 아이들 얼굴은 잘 모르지만 그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로 잘 안다. 자식들은 애비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 아버지도 나와 내 동생 이야기를 하시면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셨으리라.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까까머리 아이들이 어느 듯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이제 청년들이 되었다. 혹은 애비의 기대에 따라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내 주변의 애비들은 모두 자식들이 자기보다는 잘되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그러지 못했을 때 아비들은 좌절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 같다.
셋이서 모였지만 셋 모두 자신만의 삶의 무게를 다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만나 서로 자신의 무게를 서로 비교해보고 그래도 내가 네놈보다는 조금 낫구나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여지없이 그게 그거야 하는 답이 튀어 나오지만 말이다.
고교때부터 서로 힘이 쎄다고 힘자랑하던 두 친구와 헤어진 것은 12시가 넘어서였다. 내가 그 친구의 영혼을 위로해줄 방법은 없다. 아무리 오랫동안 친구를 해왔어도 그 친구의 삶의 본질에 나는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각자의 몫일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냥 이렇게 인생을 같이 가는 것 밖에는...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침부터 내 귀에 들어있던 귀뚜라미 소리가 작아진 것이다. 그게 약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친구들 만나 잘 먹고 서로 떠들고 싸우다가 헤어져서 들어왔는데 이명소리가 줄었다는 것이다. 한의사 친구가 그거 모두 스트레스라고 하더니 그런가 보다. 아마 이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가장 좋은 약이 아니었나 보다.
아침에 눈을 떴다. 이명소리가 많이 줄어있었다. 그렇다. 나이 드니 오랜 친구가 가장 좋은 약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