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항토길을 걸으면서

20171001

며칠간 약기운에 정신이 없어서 황토길 걷기를 하지 못했다. 마음먹고 황토길 산책에 나섰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황토길 산책로 입구에 놓여 있는 보관함에 넣었다. 맨발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한발 한발 내딛는다.

발바닥을 통해 이런 저런 느낌이 전해온다. 제일 먼저 차가운 느낌이다. 며칠 전에는 분명 시원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차갑다. 그 무덥던 여름이 어제 같았는데 이제는 다시 가을이 되었다.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세월이라는 것이 이렇게 빠르구나 하는 것을 다시 느낀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시간이 빠르고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내가 느끼는 것이 그들이 느낀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걸음 한걸음을 내걷는다.

맨발로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줄 알았는데 맨발로 내가 직접해보니 좋았다. 운동효과가 다르다. 평소에 걷는 것을 즐겨하기 때문에 신발신고 걷는 것과 맨발로 걷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했다. 그런데 걸어보니 다르다. 한 시간 정도 걸었는데 배가 고프다. 에너지 소모가 그냥 걷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맨발로 걸으면서 좋았던 것은 아무 생각없이 걷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맨발로 걷다보면 다른 일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한 걸음 한걸음이 위험한 것이 맨발로 걷는 것이다. 물론 내가 걷는 길은 관청에서 시시때때로 손을 보아서 깨끗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감촉은 나를 늘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발바닥이 둔감한 것 같지만 맨발로 걸어보면 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그만 모래알 하나도 내 발바닥은 느끼며 나를 채근한다. 조심하라고.

한걸음 한걸음씩 조심하다 보면 내 정신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언젠가 해인사에 간적이 있었다. 해인사 대웅전을 올라가는 계단이 좁고 무척 가팔랐었다. 잘못 발을 헛 디디면 낙상하기 딱 맞춤이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물었다.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계단 오르는데 집중하라고 그렇게 만들었단다. 걸을 때는 걷고 먹을 때는 먹고 누울 때는 누으라는 것이다. 정신을 한군데 오롯이 집중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득도한 것이라고 했다.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생각이 얼마나 천방지축인가를. 나도 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은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맨발로 걷기 시작하면 아무 생각없이 발바닥으로 온 정신이 집중되는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바닥은 나에게 이야기 한다. “여기는 부드러운 곳이군. 좋아. 음 여기는 좀 딱딱하고 모래알갱이도 많아. 자칫하면 발을 다칠 수 도 있으니 조심하라구.” 발바닥이 나에게 건네는 무수한 경고를 듣다 보면 다른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다.

조금 걷다보면 감각이 무디어지기도 한다. 나에게 경고를 거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고 발바닥도 화끈화끈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고개를 들어 앞을 볼 수 없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조금 높아질 뿐이다.

왕복 1km 정도 되는 길을 한번 오가는데 20분은 족히 걸린다. 세바퀴 정도 걸으면 1시간이 지난다. 그 정도 되면 가벼운 허기가 느껴진다. 기분 좋은 느낌이다. 배고픈 느낌이 기분좋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일이다. 어릴 때는 항상 배가 고팠다. 하루 세끼 밥을 굶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 밥을 굶긴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이웃의 아이들은 가끔 끼니를 건너기도 했다.

한세대 사이에 이런 어마어마한 변화가 생기니 어찌 세대간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본 세대와 풍요속의 또 다른 빈곤을 겪는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내가 전정 내 아이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겪은 과거의 빈곤을 아이들이 이해해 줄까?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겪은 과거의 삶을 이해한다고 해서 지금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 난 아이들에게 내가 어릴 때 어떠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삶일 뿐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도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연민은 통상 내가 가장 어려운 때 찾아오곤 했다.

내발은 자유로웠다. 양말과 신발 속에 꼭꼭 쌓여 있던 내발은 자유를 만났다.
맨발은 자유로웠다. 내 신체의 일부가 대지를 접촉하는 그 느낌.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는 내 발이 언제 다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맞서야 했다.
그렇다 자유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자유란 선택이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기분 좋은 배고픔을 느끼며 수돗가에 앉아 발을 씻는다. 발의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다시 앉아 하늘을 본다.
양말을 집어 들었다. 이제 내발은 다시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영어의 몸이 되려한다.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4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