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박근혜의 구속기간 연장을 보면서, 절차적 정당성과 정의의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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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구속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속기간 연장이 아니라 재구속이 맞는 말인 듯하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두고 설왕설래하더니 그냥 유야무야 처리되고 만 느낌이다.

필자는 박근혜의 탄핵이후에는 그쪽에서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했다. 그냥 신경을 끄고 싶었다. 듣기도 싫었고 보기도 싫었다. 간혹 재판진행간에 그녀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하는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력이란 냉정한 것이다. 권좌에 있을 때는 세상이 자기 손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거기서 물러나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법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중에서 데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도 이기고 아테네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장군이었고 또 정치인이었다. 젊을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어느날 데미스토클레스가 아버지와 같이 길을 갔다. 마침 비가 내렸다.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고 사람들을 길을 갔다. 어린 아이들은 나무가지를 꺽어 서로 장난치고 놀았다.

데미스토클레스의 아버지가 데미스토클레스에게 말한다.

“저것을 보아라. 저 나무가 정치가의 운명이다.”
“사람들은 어려울때는 나무밑에서 비를 피하듯 정치가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어려움이 끝나면 정치가는 버림을 받는다”
“그것이 정치가의 운명이다.”

데미스토클레스는 평생 이말을 가슴에 새겼다. 도편추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만년에 데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을 당했고 그리스인에게 버림을 받았다.

정치지도자들이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것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권력의 정상에서 쫓겨나 비참한 죽음을 맞아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헤겔이 역사는 영웅이 움직이고 영웅은 자신의 소명을 다한 다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며 그것을 ‘역사의 간계 cunning of history’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박근혜가 제대로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더라면 정치가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 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허무한 영어의 몸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필자는 박근혜를 재구속 시킨 것이 정당한 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 뇌물사건으로 구속시켰고 그 구속기간이 만료되자 곧이어 다른 건을 들이대 구속을 시켰다.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박근혜는 평생 구속상태에 있을 수 있다. 롯데와 관련된 구속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건으로 또 구속시키면 된다.

필자도 작년 추운 겨울에 박근혜 탄핵을 부르짖었던 사람이다. 필자의 지난 포스팅을 보면 알 것이다. 필자는 블랙리스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당시의 야당 지금의 여당과 언론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 포스팅한 적도 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입장이 여당이냐 야당이냐에 따라 잘못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초등학교때 부터 배웠다.

현실세계에서 잘못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들의 윤리적 수준이 초등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박근혜를 재구속한 것은 문제가 많다. 법의 정신에 따르면 당연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 박근혜를 재구속한 것은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법은 사회적 합의이다. 내가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적용기준과 방식이 달라져서는 안된다.

지금의 박근혜를 도와줄 정치세력은 아무도 없다. 소위 자유한국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박근혜를 출당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당권을 잡고 있다. 박근혜가 재구속되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박근혜가 힘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라고 해서 법의 기준과 원칙이 바뀌어져서는 안된다.

박근혜를 역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그 심판이 의미가 있다. 법의 정신을 어기고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박근혜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박근혜는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승복하지 않으면 정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정의를 원하는가? 그냥 한풀이와 같은 정의인가. 아니면 모두가 승복하는 재대로된 정의인가.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는 심판은 정의롭지 않다. 우리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인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많이 보았다. 이런 문제에 눈을 감아 버리면 정의는 왜곡된다. 아마 정권이 바뀌면 현정권에 있는 사람들이 또 정치적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정치가의 운명은 나무가지와 같다. 지금 국민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것 같아도 언제 고꾸라질 지 모른다. 고꾸라지는 그 순간 수없이 많은 하이에나들이 달려든다. 아마 박근혜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기분이 나쁘고 심사가 비틀리더라도 참고 절차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현정권이 살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 지금같아서는 다음번 정권이 바뀌면 지금보다 더한 정치보복이 자행될 것이다.

그게 눈에 안보이나 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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