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역사탐방) 쌍계사 가는 길, 그리고 성삼문의 묘소

20171008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 묘소가 있다. 어릴 때 간혹 사육신 묘 참배를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간혹 갔었다. 갈 때마다 사육신들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얼마나 의연했는지를 듣곤 했다. 나도 나중에 죽을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죽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일생 큰 굴곡없이 평탄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복락이구나 하고 느낀 것도 요즘의 일이다. 높은 벼슬과 많은 돈도 모두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필자는 연휴기간 내내 사무실에 매여 있었다. 집에 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차례도 지내지 못했다. 연휴 마지막에 큰 프로젝트가 있어서 준비를 해야 했고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중간 중간에 시간이 남았지만 서울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남으면 필자는 차를 타고 여기저기 역사탐방을 다닌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다. 우리주변에 얼마나 많은 역사유적지가 있는지를? 다녀보면 수천 년의 역사가 이 땅 이 곳 저 곳에 널려있다.

유적지를 하나씩 보는 것이 필자의 취미라면 취미이고 낙이라면 낙이다. 책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직접 가보면 느낌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직접 다녀서 볼만한 탐방장소가 지천에 널렸다. 평생다녀도 못 볼 정도로 많다. 수천년의 역사가 그냥 흘러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이번 연휴기간에도 짬짬이 여기저기를 다녔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수덕여관과 수덕사도 다녀왔고 정순왕후 생가도 다녀왔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계비이다. 정순왕후는 정조를 압박하기도 했고 정조가 죽은 다음에는 천주교도 박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 사람이다.

논산 쌍계사에도 다녀왔다. 쌍계사하면 다들 하동의 쌍계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논산에도 쌍계사가 있다. 논산 쌍계사는 대웅전 건물이 유명하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바라 직접 한번 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성삼문 묘지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웬일인가 했다. 헷갈렸다. 성삼문 묘소는 노량진에 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묘지 입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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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는 매우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묘지입구에 사당이 있고 묘지기 집 같은 것도 있었다. 성씨 일족이 충청도 쪽에 살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조성된 묘역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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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 들어서니 저 멀리서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날 반긴다. 조그만 것이 짓지도 않고 나와 놀아달라고 한다. 그리고 묘지가는 내내 나를 따라 다닌다. 거참 신기한 놈이다. 묘지 올라갈 때도 앞서서 가고 내려올 때도 앞서서 내려간다. 마치 길을 안내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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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입구에 묘지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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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지나 조금 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의 이름이 성인각 成仁閣이고 입구가 무이문 無二門이다. 무이문이라 무슨 뜻인가 했다. 아마도 불사이군을 이른 말인 듯 하다. 죽을 지언정 두사람을 임금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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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을 읽어보니 당시 성삼문은 거열을 당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거열이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찟어진 성삼문의 시신은 전국에 흩어서 버렸다고 한다. 마침 논산지역에 버려진 성삼문의 시신 한조각을 수습해서 묘지를 만든 것이 지금의 성삼문 묘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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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옆 비석은 오랜 시간 때문인지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 조차도 어렵다. 충신을 위해 재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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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은 충절을 지켰지만 그의 처첩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처첩들은 노비가 되었다. 노비가 되어서 웃음을 팔면서 잘 놀아났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어른에게 이야기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꼴을 보고 뒤에서 지 서방은 사지가 찟겨서 죽었는데 고을 수령놈들하고 놀아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어른들은 서로 옛날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시곤 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지금과 달리 어디 딱히 갈데도 없어서 저녁이면 대부분 집에 앉아서 어른들 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참 좋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변절자의 상징이던 신숙주는 세조에게 죽은 단종의 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했다고 한다. 단종이 죽은 다음 단종의 비가 노비로 강등되었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노비로 강등된 단종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한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단종의 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했을까?

나이가 이만큼 들어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가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이러 저리 몸부림을 쳐보지만 과연 나는 만족스럽고 행복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마 죽을 때까지 회의와 한탄 그리고 비탄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한다.

세조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아무도 단종비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평탄하고 아무 일없이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권력에 가까울수록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남의 권력과 돈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대륙의 끝 반도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나라지만 사라지지 않고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성삼문 같은 충신 열사 덕분이 었을 것이다. 우리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군대가 강했던 것도 아니었다. 고대에는 그랬지만....

그나마 이 정도로 나라가 유지되고 우리가 한국어를 하고 살게된 것도 정신적인 힘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지금 공직을 하는 사람중 얼마나 성삼문 같은 기개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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