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밋의 논쟁을 보면서 : 스티밋의 단독자

20170830 올드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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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고민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방안이 뚜렷하지 않으면 어느 한편에 선다. 스스로 자신의 해법을 선택하고 시행하기는 어렵다.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나 주어진 특권이다. 보통의 경우 내가 방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그저 남들이 제시한 것에 따라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필자가 그간 살아오는 동안 우리사회를 보면서 느꼈던 것이다. 우리사회의 한계라고 말이다.

요즘들어 스티밋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매우 고무적이라고 느꼈다.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내가 속한 집단이나 진영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단독자로서 현실에 용감하게 부딪치기보다는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스티밋에서 각자의 목소리가 백가쟁명처럼 터져 나온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갑자기 각자 다른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다보니 소란스러운 점도 없지는 아니한 듯 하다.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자. 살아오면서 스티밋에서처럼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보적이 있었나를. 필자는 거리낌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왕따된 경험이 한두번 아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다수의 주장에 따르지 않는 개인은 철저하게 응징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라는 것이 집단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일본에서 이지메라는 것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것 처럼 말이다. 옛날 일본 촌락에서는 제일 똑똑한 놈하고 제일 문제 많은 놈을 솎아 마을 밖으로 쫓아 냈다고 한다. 특별한 놈이 있으면 마을이 고생한다고 말이다. 우리사회도 일본보다 덜하지는 했으나 유사한 경향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사회에서는 살아가려면 어디엔가 기대야 한다. 내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유독 사내 정치가 심하고 붕당을 짓는 것이 보편화된 것은 역사적 경험때문일 것이다. 붕당과 진영논리에 철저했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임진왜란때 동인과 서인의 싸움도 바로 그런 현상이다. 그런 현상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소위 보수니 진보니 해서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타자화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개인으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집단에 속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바로 붕당과 진영을 선택하는 이유이다.

지금은 탄핵되었지만 박근혜 신드롬이 온 나라를 뒤짚은 적이 있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닥치고 박근혜였다. 오죽하면 선거의 여왕이라고 했을까? “대전은요” 한마디에 충청도 민심이 요동을 쳤다. 그런데 탄핵당했다. 노빠가 있었다. 노무현이라고 하면 무조건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우파건 좌파건 가장 위험할 때는 대중들이 그들을 맹목적으로 신봉할 때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독일에서 나찌가 득세한 것은 독일 국민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는 박근혜 신드롬과 노빠 혹은 문빠 현상에서 에리히 프롬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없다보니 어디엔가 기대려고 한다.

독재는 바로 그럴때 이루어진다. 총칼로 구데타로 만들어진 독재는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저당잡히고 더 이상 사유하지 않으려하고 정파에 의탁하려고 할 때이다. 필자가 박근혜 주의자와 노빠주의자를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지금 스티밋에서는 항상 주의 주장이 만발하다. 이것을 보고 성가시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필자는 이런 현상을 매우 고무적이라고 본다. 더 떠들고 더 목소리 높여서 자기의 주장을 이야기 했으면 한다. 한국인은 평생 억압당하고 살았다. 그런데 스티밋에서 조차 제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면 어떻게 되겠나? 적어도 스티밋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서로간의 예의는 지켰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옳고 네가 하는 이야기는 틀리다는 식으로는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틀린지 맞는지는 지나가봐야 안다. 그전까지 우리는 그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너무 분명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논쟁의 대상이 아예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예외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학교다니면서 토론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토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토론의 기본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냥 닥치고 너 틀렸어 라고 하는 식의 주장은 토론이 아니고 협박이다.

내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상대방이 내 생각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판을 깨는 것도 옳지 않다. 살다 보니 목숨걸고 옳다고 주장했던 이야기들이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보았다. 분명한 증거와 자료를 가지고 재판하는 판사들도 오판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스티밋은 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명백하게 옳고 명백하게 틀린 것이 얼마나 많을까? 대부분은 그것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열받아서 팽하고 나가버린다면 그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단독자로서 자신만의 생각에 충실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다. 물론 그렇다고 스티밋에서 나가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티밋은 열린 공간이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생각에 달려있다. 누구도 나가라고 하거나 남아 있으라고 할 권한은 없다.

건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권위의 우상이 사라져야 한다. 각자 한사람 한사람이 단독자로서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스팀구매와 관련한 다양한 주의 주장이 올라오는 것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그렇게 움직이게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독재가 별것인가? 바로 그것이 독재이다. 남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남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 독재아니겠는가. 그것도 진영논리에 따라서 말이다. 스티밋은 열린 공간이기에 누가 뭐라하던 나는 내 갈길만 가면되는 곳이기도 하다. 누가 뭐하고 해도 너는 그래라 나는 안한다 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아무도 누구의 행동을 강제하지 못한다. 어뷰징 빼고.

신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우리모두 스티밋의 단독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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