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여유와 무료함의 사이에서, 열흘 넘는 긴긴 연휴를 보내며

201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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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정도의 길고 긴 휴일을 보냈다. 집에 가지 못하다보니 시간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다녔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삶이란 정말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때어나서 한번 뿐인 삶을 살아가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니 말이다.

인간이 부모로부터 몸을 받고 태어나 살아가는 기간은 몇십년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짧다. 젊을 때는 그 젊음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은 흘러가서 청년을 중년으로 중년을 노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까지 수십년을 살아 오면서 내 삶에 얼마나 진지했는지 생각해보니 아쉽기만 하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조직의 일원으로 시키는 일하면서 살았다. 가끔 말도 안되는 일이 있으면 소심한 항거를 하기도 했으나 별로 성과있는 결과는 거두지 못하고 스스로 농성을 풀고 말았다.

남들이 다하는 것처럼 하고 살았다. 학교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봉급을 받았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쥐꼬리만한 봉급에 목을 매고 살았다. 살다보면서 기회라는 것도 있었다.

문제는 기회라는 것이 대부분 내 삶의 원칙을 버려야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꺼림직한 기분이 들어서 그 기회라는 놈을 잡을 수 없었다.

기회라는 놈이 날 희롱 하면서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덥석 잡을 수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때 왜 내가 붙잡지 않았을까하는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잘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만일 그때 덥석 물었더라면 코꿰인 소마냥 이리저리 끌려다녔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던 덕택이었다고 위로를 한다.

여유와 무료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유를 바란다. 돈을 벌고 일을 하려는 것도 모두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주어지면 무료함을 느끼고 삶의 의요을 잃어버린다. 원래 인간은 여유롭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면 안되는가 보다. 그저 항상 바쁘게 닦달을 당하면서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 것인가 보다.

연휴기간 동안 집에 혼자 앉아서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 명상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여유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땅바닥에 책상다리 하고 앉으면 무릎이 쑤시는 바라 의자에 앉아서 편한 의자에 앉아서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을 시도했다.

조금 지나니까 눈이 슬슬 감기면서 졸린다. 무지하게 졸린다. 결국 침대로 가서 잠을 잤다. 그래 여유를 즐기는 가장 좋은 것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하루 종일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낮에 한번 깊게 잠을 자면 밤잠을 설친다. 그러면 대책이 없다.

결국 몸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황토 길에 가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두 시간 이상을 걷기 어렵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와도 시간은 한참이 남는다.

법정스님은 그 긴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 분도 정말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을까? 혼자 있는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런 저런 말을 물어보고 했을 테니 절대적으로 혼자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을 성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을 때 법정스님 책을 많이 읽어보았다. 혼자서 하라는 말을 무척 많이 강조하셨다. 그런데 혼자하는 것이 쉽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혼자라는 것이 정말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 다음날은 카메라를 둘러메고 여기저기 역사탐방을 다녔다. 모두 무료함을 면해보기 위해서였다.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온전하게 소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죽을 때까지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한 걸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일에 매달려서 정신없이 살아가야 행복한 것일까?

어쩌면 삶은 무료함과의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무료함만은 견뎌낼 재간이 없다. 삶은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일을 해서 무료함을 달래고 그래서 받은 보상과 댓가로 다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신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많은 희생을 치룬다.

그 무료함을 여유를 즐기는 것으로만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득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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