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극단의 시대와 중간에 서기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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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극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원래 극단의 선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도 인간은 선과 악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되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태는 허용되지 않았다. 과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태는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것은 인간에게 용납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존재는 악보다 더 한 악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좀비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가 좀비다. 좀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사회에서 좀비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은 기존에 악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바로 좀비이기 때문 아닐까?

왜 좀비를 악마보다 더 공포스럽도록 느끼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좀비가 이도 저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지 죽어있는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인간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기존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편하게 느끼게 된다.

역사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극단의 선택이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된 인간은 극단의 편에 선다. 그리고 서로 싸운다. 전쟁은 바로 그런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을 보라. 어떻게 되었는가? 극단은 결국 반동을 불렀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수없이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대부분도 서로 극단의 형태를 띤다. 모든 문제가 옳거나 아니면 틀리거나로 귀결된다.

일전에 필자가 박근혜의 재구속 결정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필자가 그 당시에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박근혜와 그의 일파들이 재구속 결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댓글에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가 구치소에서 특혜를 받고 있다든지 또는 친박들이 하는 짓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재구속이 당연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짓은 메스껍다. 그러나 기분나쁘고 메스껍더라도 좀 더 멀리보고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도록 해야한다.

모두 정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정의의 구현에는 현실이라는 방해물이 있다. 그 방해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정의는 더 멀리 가버리고 만다.

중간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극단의 선택을 하면 한쪽으로부터 욕먹으면 된다. 그러나 중간의 길을 선택하면 양쪽으로부터 모두 욕을 먹게 된다.

회색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도 중간주의자들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그들의 길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선명한 이념의 편에 섰던 사람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당연히 극단의 편에 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정치인들은 극단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추미애가 머리가 나빠서 상대방의 속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추미애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극단주의자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나 정치를 좀먹는다. 역사적으로 한번보라. 한쪽에 치우친 선택을 해서 잘된적이 있는지?

중간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렵다. 오죽하면 중용이라는 책도 있을까?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쉽다면 중용이라는 책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용을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간혹 중용을 흐리멍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중용은 결단력이 없고 우유부단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냉철한 이성적 판단으로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여 최상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용은 또다른 극단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기없는 길을 가야하는 것이 중용의 길이다.

우리의 정치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려면 극단의 편에 몰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의 끝이 아니라 현실의 끝을 바라보는 지혜가 중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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