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가 넘었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외출해야할 용무도 없는
대성은 그냥 눈을 감고 주말의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속으로 빠져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꿈을 꾸고 있는 듯, 눈을 감고 무언가를 자꾸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 '하니 하니 내사랑'하고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누워있는 대성의 귀를 괴롭혔다.
대성은 전화받기가 한없이 귀찮았다.
그래서 몇번 전화를 받지않고 벨소리가 울리게 그냥 놔 두었다.
그러나 전화는 30초 간격으로 계속 걸려왔다.
마침내 대성은 다섯번째 벨소리가 나자 마지못해 머리맡으로 팔을 뻗어 콘센트에 꽂혀있는 스마트폰을 자신쪽으로 당겼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니 알지못하는 번호가 떠 있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대성은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 건너폄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대성이 꺼끌꺼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이대성씨 전화이지요?"
여자가 말꼬리를 좀 길게 빼며 말했다.
"네. 그런데요."
"저 기억하시죠? 어제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이요."
"아! 네. 기억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잠시 만나뵐 수 있을까요? 제가 점심 살께요."
"점심이요? 왠 점심을…"
"어제 일에 감사할 겸 해서요. 뭐 특별한 일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만나뵐 수 있겠지요? 저 지금 방배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집 위치를 알려주시면 찾아갈께요."
"그러시겠어요? 얼마나 걸릴 거 같은가요? 저 샤워도 좀 하고 그럴 려고요."
"네. 그럼 제가 1시간후에 도착하도록 할까요?"
"네 그러세요. 집 주소는…"
대성은 주소를 말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야호! 왠 미인이 나한테 관심을 가지지. 나한테 반한 건가! 근데 이거 이상한 여자 아니야? 내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명함 한장 받아가고선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하나! 아무튼 횡재다 횡재!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야호!"
옷을 훌러덩 벗어 아무렇게나 세탁기 안에다 던져넣은 후,
샤워기를 틀어 물을 몸의 이곳저곳에 뿌려대며 대성이 혼잣말을 했다.
"뭐 좋아하세요? 일단 뭘 먹을 건지 정하고 가도록 해요."
여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대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거나 좋은데요. 근데 뭘 먹어야 할 지…"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뭘 좋아하시는지. 제가 사기로 했으니 어서 말씀을 해 보세요."
"아니요. 정말 뭘 먹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생각을 안 해 봐서요. 먹는 것에는 생각을 잘 안하거든요."
"그러세요? 그럼 제가 정할까요?"
대성이 눈웃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럼 중국음식 먹으러 갈까요? 이 방배동 근처에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있거든요. 주방장이 중국에서 온 사람이에요."
"네. 그거 좋을 듯 하네요."
"호호. 그럼 거기로 가면 되지요? 나중에 불평 마세요."
대성이 짧게 고개를 끄떡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차에 시동을 걸며 여자가 말했다.
"아니요. 그냥 전…"
대성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흐렸다.
"아니요. 정말 감사해요. 사실 저 그 사람 때문에 무서워 죽겠어요."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원래 잘 알던 사이인가요?"
"아니요. 전혀 몰라요. 그런데 저의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집앞에서 갑자기 나타나질 않나. 아니면 어제처럼 지하철을 탈 때나 마트에 갈 때도 그 사람이 어떻게 알고 따라오는지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여자가 근심어린 눈빛을 빛냈다.
"신고해 버리세요. 그거 스토커 행위로 처벌할 수 있어요."
"신고할까도 생각해 봤는데 보복할까봐서 못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그래도 저에게 말을 걸거나 해코지를 하지는 않거든요."
"지금은 아무짓도 안 하지만 혹시 나중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접근금지명령청구라도 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한번 생각해 볼께요."
여자가 싱그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혹시 요즘 만나는 여자분 있으세요?"
"저 그게…"
여자의 갑작스런 물음에 대성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가 보기에 아주 좋으신 분 같아요. 제가 가끔 부담없이 전화해도 될까요?"
"네 그래도 되긴 한데…"
심장박동수가 급격하게 증가되어 대성은 호흡곤란을 느꼈다.
"아무튼 이렇게 좋으신 분 만나서 정말 좋아요. 호호."
대성은 터질 것 같은 심장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양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쳤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여자가 걱정어린 시선을 대성에게 던졌다.
"아니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대성은 머리가 멍해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벌써 다 왔네요. 저 곳이 중국음식으로는 아주 유명해요.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도 자주 오는 곳이에요."
여자가 도롯가에 차를 대었다.
"내리세요."
주차요원이 찻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대성과 여자는 차례로 차에서 내려 인도로 올라갔다.
"열쇠 주시겠어요?"
50대중반의 남자 주차요원이 여자에게 말했다.
"네. 여기요."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차요원에게 열쇠를 건넸다.
"자 그럼 갈까요?"
여자가 별안간 대성의 팔짱을 끼었다.
"네."
대성은 여자의 진한 화장품과 머리에서 풍겨오는 샴프 냄새를 맡자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 연신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두 분이신가요?"
자동문 안으로 들어가자 30대초반의 여자가 대성과 여자를 맞이했다.
"네. 두 사람이요."
여자가 명랑한 목소리를 내었다.
"따라오세요."
대성과 여자는 서빙을 하는 여자를 따라 걸어갔다.
"이쪽이면 괜찮으시겠어요?"
서빙하는 여자가 15번이라고 적힌 탁자를 가리켰다.
"네. 좋네요. 구석진 곳이라 다른 사람들하고 얼굴 마주칠 염려도 없고."
여자가 끼었던 팔짱을 푼 후,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주문하실 거 있으시면 여기 벨을 누르시면 되고요."
서빙하는 여자가 탁자의 구석에 놓인 벨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그럴 께요."
여자가 대성에게 눈짓을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대성은 천천히 의자를 빼어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드시겠어요?"
여자가 대성에게 눈웃음을 쳤다.
"아무거나요."
대성이 짧게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제가 골라요?"
"네 그러세요."
대성이 다시 짧게 말했다.
"그럼 어디 볼까요? 일단 새우튀김하고 탕수육하고 샥스핀 어때요? 이거 먹고 더 시키면 되니까요."
"그러세요."
"술은 뭘로 할까요? 점심시간이라서 좀 그렇기는 한데 한잔 마셔야 되지 않으세요?"
"저 그러지요 뭐."
"뭘로 하실래요? 여아홍 이거 드실래요?"
"아니요. 소주로 마시렵니다."
"그럼 그러세요."
여자는 매끈한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시키시겠어요?"
서빙하는 여자가 벨을 누른지 15초도 안되어 신속히 다가와 말했다.
"네 이거하고 이거하고 이거 주시고요. 술은 소주로 주세요."
여자가 메뉴판의 글씨를 손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네. 더 시키실 것은요?"
"일단 좀 먹고 시킬 거 있으면 주문할 께요."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바로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서빙하는 여자가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기신 분이 왜 아직 결혼을 안하셨어요?"
여자의 느닷없는 도발적인 발언에 대성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 눈이 높으신가봐요! 그렇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저 사귈 기회가 없어서…"
대성은 자신이 언어감각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의심을 하였다.
"저는 어때요?"
대성은 도저히 여자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제가 별로 안 좋으신가봐요! 그렇죠?"
"아 안 조옿으은 게에에에 아니고요. 너무 급작스러워서어어어…"
대성은 작아지는 목소리로 모음을 길게 빼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우리 좋은 사이로 남아볼 래요?"
이젠 대성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져 불꽃이 일어날 정도였다.
"저야 좋지만…"
"호호. 그럼 됐어요. 우리 잘 사겨봐요."
여자가 환한 미소로 말했다.
"주문하신 거 놓아드리겠습니다."
서빙하는 여자가 음식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서빙하는 여자는 빠른 손놀림으로 음식그릇들을 하나하나 탁자위에 놓고서
재빨리 다시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자가 소주병을 들고 대성에게 한잔 따라주며 말했다.
"사랑이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예상치도 못하게 받는 선물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성씨는?"
"그거 좋은 표현 같은데요. 뜻밖에 받는 선물이라 그거 좋아요. 하하."
대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저 어제 그 선물을 받은 거 같아요! 호호."
대성은 여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입술이라도 당장 부딪치고 싶었다.
"야! 아들아! 좀 이젠 결혼좀 해라 제발. 나도 내 친구들처럼 손주좀 보자."
"엄마 좀 기다려봐요. 나 한명 낚은 거 같으니까."
"오! 그래? 이제야 너 인간이 좀 되려나 보다 하하."
전화 건너편에서 호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언제 집에 데려올거냐? 며느리."
"내일이라도 데려갈까요?"
"좋지 좋아.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니가 도대체 지금 몇살이냐? 내가 죽기전에 너 결혼하는 거 못 볼 줄 알았다. 정말."
"알았어요. 내일 데려가서 인사시킬 께요."
"오! 그래? 내가 그럼 식구들한테 말해서 준비해 둘 테니 데려와."
"네. 내일 갈께요."
"하하. 우리 아들 이제야 인간이 되었구나! 하하."
"엄마! 나 지금 출근해야하거든요. 나중에 또 통화해요."
"그래 그래. 어서 출근해라. 나 오늘 기분 최고다. 우리 아들 장하다. 하하."
대성은 스마트폰의 통화종료버튼을 터치한 후, 후다닥 일어서서
욕실로 달려갔다.
"내일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회사복도를 걸어가며 스마트폰에 귀를 대고 대성이 말했다.
"인사? 왠 인사?"
"우리 결혼해야 하잖아. 그 전에 부모님께 인사드려야지."
"결혼? 나 그런 프로포즈 받은 적 없는데…"
"정식으로 프로포즈하란 말이군! 알았어. 오늘 할께. 나와."
"몇시에?"
"7시 어때?"
"좋아. 내가 자기 회사앞에 갈까?"
"그렇게 해."
"그럼 그 때 보자."
여자의 짧막한 목소리와 함께 뚝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이 대리! 뭐그리 좋은 일 있다고 싱글벙글이야."
40대중반의 남자가 복도 저편에서 대성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저 결혼할 지 몰라요."
"오! 그래? 여자가 생겼군! 축하해. 근데 누구야? 우리 회사 사람인가?"
"아니요."
"이런 이런 우리 회사 사람이면 사내 커플이라 해서 예식비를 받을 지도 모르는데 아깝군!"
"부장님이 좀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하하."
"도와주고는 싶지. 근데 나는 경제권이 없어. 마나님이 날 꽉 잡고 산단 말이야."
"아무튼 저 결혼할 때 오실 거죠?"
"당연히 가야지. 당연히. 언제 할 건데?"
"아직 날은 안 잡았어요."
"그럼 날 잡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네. 그럴 께요."
"이 대리님! 결혼하세요?"
20대중반의 여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왜? 예리씨! 질투 나?"
부장이 능글거리는 미소로 말했다.
"질투나죠. 날 두고 잘생기신 이 대리님이 결혼하는데 당연히 질투나죠."
여자가 씽긋 웃었다.
"그래 그럼 이 대리 다른 여자한테 한눈팔기전에 예리씨가 잘 해보지 그랬어."
"그럴 려고 했는데 이 대리님이 전혀 저한테 눈길을 안 주더라고요. 저 얼마나 상처받았었는데요."
여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이 대리가 눈길을 안 줬을까. 이렇게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쁜 예리씬데. 그런데 예리씨 어떻게 몸매관리 하길래 그렇게 이뻐?"
"왜요? 부장님도 몸매관리 하시려고요?"
"내가 몸매관리 해서 뭐하나. 내 마누라 몸매관리 시킬라고 하는 거지. 워낙 집에서 잘 먹어서 그런지 살만 디룩디룩 쪄서 말이지."
"호호. 그러세요? 전 부장님이 몸매관리 해서 다른 여자분을 꼬시려고 그러는 줄 알았죠."
"그럼 몸매관리해서 예리씨나 꼬셔볼까."
"됐어요. 부장님! 전 부장님 같은 스타일 정말 싫어해요."
"이런 이런 정말 틈도 안 주는구만! 내가 이 대리보다 못할 게 뭐 있어?"
"못한 게 많죠. 일단 얼굴에서도 딸리시고."
"됐어. 예리씨! 나 상처 받으면 정말 무서워져."
"호호. 부장님! 얼굴 빨개졌다."
"어떻게 몸매관리 하는지나 말해봐. 그 비밀좀 알아서 마누라한테 말해주게."
"뭐 별 거 아니에요. 지방제거시술을 좀 받았거든요."
"지방제거술?"
"네. 리포소닉이란 지방제거술인데요. 초음파로 1시간 정도 복부지방을 태우니까 허리사이즈가 2인치 정도 줄어들 더라고요."
"그래? 야! 그거 정말 좋은데. 부작용은 없어?"
"네. 부작용이라고 해봐야 리포소닉시술 받고서 약간 붓기가 있고 좀 며칠간 피곤한 정도. 그거 말고는 없었어요."
"하긴 초음파가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지."
"네. 볼록렌즈의 원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초음파를 한곳에 강하게 쏘아서 목표로 한 부위를 태우는 거 거든요."
"어디서 그 리포소닉인가 하는 거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 상담신청해 보세요. 바로밑에 이미지 보이시지요? 그거 누르시면 해당 사이트로 가는데 거기서 상담신청하시면 전화가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