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홀로 있었던 때가 있었을까? 잘 생각해보면 나란 생각이 언제부터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나는 내가 존재하였다고 과연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1 나는 내가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와 아닌 누군가와 소통을 하는 그 순간부터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같다.
- 수행의 근기가 있는 사람들은 수행(명상)을 통해서 과거(태어난 시점)뿐만 아니라 전생까지도 기억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나를 포함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관점을 선택한다. 관점이라는 것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무게중심을 어딘가에 두는 것인데,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가에 따라서 관계를 통한 소통속에서 친근감이 형성되기도 하고 적대감이 형성되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친밀해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너무 싫어해서도 문제인 것 같다. 관계란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타자와 반응하여 일어나는 경계가 있기 때문인데, 그 친밀함(인력)과 적대감(척력)이란 것이 한쪽으로 치우쳐진다면 고립과 분열을 야기할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국수주의, 우월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등등 무슨 무슨 ~ism의 역기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싸움만 있을뿐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려!
AQAL(아퀄이란?)
켄윌버와 통합사회 자료 by 진정
통합이론Integral Theory에서 세상을 보는 틀로써 AQAL(아퀄)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림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우리가 세상과 대면할 때 무엇이든 이렇게 5가지(온상한, 온라인, 온수준, 온상태, 온유형) 큰 범주로써 쪼개서 보되 이를 모두 고려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어느 한 범주에 고집하여 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미一味/one taste 즉, 한 맛이라는 표현을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먹을 때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각각의 성분들은 자신들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냥 된장찌개 전체를 한 숫갈 떠 먹으면서 맛 하나로서 우리는 음미할 뿐이다. 이와 같이 내가 세상을 경험할 때 마주치는 모든 현상들은 한 맛으로서 우리가 경혐할뿐 그 속에 특정한 무언가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옳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옳다
이러한 전제에서 세상을 대면한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분열보다는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대개 한맛이라고 표현하면 하나의 맛, 동일한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는 구성물 모두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며 전체를 이루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획일적으로 모두가 똑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라고 하는 의미가 우리는 같아야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두를 상호존중respectful reslationship하는 기반위에 서있는 하나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획일적으로 같아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어느 하나에 고정된 즉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너무나 친밀하여서 타자를 밀어버리는 허물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다르다는 의미와 틀리다는 의미는 다른 것이다
들어가며 (부제: 운명학에 대한 견해/운명은 宿命일뿐인가? 改運인가?)
개체홀론과 사회적홀론 그리고 중앙집중 네트워크, 탈중심 네트워크, 분산 네트워크/易의 괘상으로 풀이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