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람들 사이에서는 '종교적 인간'이란 표현보다는 '영성적 인간'에 대한 표현이 많은 것 같고 친근해진 것도 같다. 하긴 요즈음 '종교'란 말보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여기에 필~이 꼿혀서 일까?
하지만, 지금과 같이 정보가 쉽게 교류될 수 있는 시대에는 뭔가 '확정짓는다'는 것이 거부감을 일으키고 좀더 포용하고 넓어지고 보편화 되는 추세인것도 같다. 왜냐하면, 종교(宗敎)에서의 '宗'자는 '마루종'으로 '으뜸, 최고'의 의미인데 즉,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이해될 수있다. 종교인들은 '모두 내 종교가 최고다!'라고 너무 외쳐대다 보니 다른 종교는 '개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르침들을 한번이라도 잘 살펴보고 대화하고 심사숙고 하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재대로 이해하지도 않고 '내 입맛'에 안 맞는다고, 혹은 피상적으로 보이는 겉모습으로 함부로 재단해버린다.
'영성(靈性)'의 의미에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보편적인 '신령스러움-靈'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루'란 있을 수 없다. 저 사람의 영도 나의 영도 모두 보편적으로 귀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교류와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기보다는 영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유학경전이 고리타분하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중고등학교때 단편적인 조각만이라도 배웠던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
大學之道(대학지도) 在明明德(재명명덕) 在親(新)民(재친(신)민)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 대학(大學)
큰 학문의 길은 '본래 밝았던 덕'을 밝히는데 있고, 사람들을 새롭게도 혹은 친근(소통/교류)하게 하는데 있고, '지극한 선함'에서 머물러 있는데에 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 중용(中庸)
하늘에서 주어진 '명'을 '성'이라고 부르고 그' 성'을 따라가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수행)'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영성적 인간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구절이다. 구한말에 살았던 주역(周易)학자 '야산(也山)'선사는 '學而覺'이라고 했는데 의역하자면 '배우다보면 곧 깨닫는다. ' 혹은 '배움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배움'이 곧 '수행'과 무엇과 다르겠는가?
學(학)은 臼(절구구)와 爻(사귈효)+ 子의 합성인데 '머리통' 속에 교류(爻)를 통한 새로움(씨앗 子)이 생성된다는 의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覺의 아래에 見이 있는데 이것은 '깨달음의 씨앗(子)'이 무럭 자라남을 바로 보고 앎이다. (머리골이 열려 그분이 오시네! 제7 차크라(제일 꼭대기 사하스라sahasrara)가 열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