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른의 정의(pen클럽 공모 응모작)

0. 어른의 정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뭘까. 내 생각에 그것은 회색의 공간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잘 살아남는 것이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 어느 한쪽 확실한 면 없이 적당히 뒤섞인 모순 속에서도 잘 견뎌내는 사람. ‘회색같은 도시’라는 표현은 콘크리트의 단면들을 그려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회색으로 물든 어른들’이 군집한 도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싫은 상황에 대하여, 싫은 사람에 대하여, 달리 함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부정의한 것이 숨 쉬고 있지만 별 수 없이 함께 살아야만 할 때, 그 비릿함을 견딜 수 있는 비위와 인내가 출중한 자들이 어른이 된다.

여기서 만약 싫은 것을 견딜 수 없다면,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살아갈 수 없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 대개 그런 경우 죽음을 택하거나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한 시점에서 더 이상 어떤 상황의 전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더는 ‘회색적 상황’을 겪어 볼 수 없다. 회색의 영역을 늘릴 수 없는 관계로 영원히 그 이상 어른이 되지 못한다. 미친 것 또한 정신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헌데 어른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살아남는 것이 가장 뛰어난 가치라면 어른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비굴함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면 꼭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어른이라는 속성에 이미 좋고 나쁨이 혼재하듯이 말이다.

때로 어른들 중에서도 ‘저게 어른인가?’ 의문이 드는 한심한 인간도 있다. 그러나 일단 나이가 든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잿빛의 순간들을 견뎌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어른들이 한심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훌륭하지 않은 탓이다. 훌륭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의 차이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으므로, 그 성질이 나이가 들어감에도 유지된다면 어떤 인간은 훌륭해지고, 어떤 인간은 비루해진다.

이러한 품성과 같은 요소들은 변하기도 하기에 결국 어른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다. 어른은 시간만 지나면 무조건 되는 것이지만, 훌륭한 인간은 시간이 지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어른이 되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고, 비천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나쁠 뿐인데,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니까.

어쨌거나 결국 살아가기로 한다면 우리는 별 수 없이 어른이 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행복과 같은 삶의 희열을 꿈꾸므로, 흰 영역을 좋아하지만, 삶이 진행될수록 번져오는 검은 영역을 목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로 살아가기로 하는 한, 우리 모두는 혼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어떤 어른이 되는 게 좋은가’ 선택하는 편이 낫다.

단지 더 오래 살기 위해 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와, 어떤 열망과 목표를 가지고 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의 차이는 크다. 이것이 결국 훌륭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을 가르는 차이가 된다. 훌륭하든 비천하든 인간은 모두 어른이 되지만, 훌륭한 어른은 생존 때문에 회색적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루고자하는 열망, 목표 등은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고, 시간을 만드는 일은 오래 사는 일이기 때문에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자유의지 없이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 단지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쾌락의 감각영역을 더 즐기기 위해-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는 비탄에 빠져있거나 저열한 감정에 휩싸여 어떤 짓이든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똑같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어떤 인간은 고결해보이고, 어떤 인간은 더없이 추해보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들이 회색적 상황을 견디는 이유, 모순 속에서도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결정하게 된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 날마다 고통이 밀려오지만 나는 이를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결코 감각을 오래누리고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게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 산다. 제 명에 죽어도 완결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마무리 짓고 싶다. 그래서 적어도 비천한 어른으로 남지는 않길. 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어른으로 이끌어주길.


본 글은 @kimthewriter 님의 '제1회 pen클럽 공모전' 응모작 입니다.
글자수는 약 2150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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